핸드폰의 상태 바에 떠 있는 편지 모양의 아이콘을 보면서 생각했다. 모바일 그룹웨어는 정말 대단한 기술이 아닐까. 회사 내부에서 메일과 결재, 소스코드와 배포본, 시시한 잡담과 중대한 공지가 왔다 갔다 하는 업무용 네트워크는 하늘이 무너지지는 않을까 고민하는 듯한 세심한 정보보호의 의지에 힘입어서 매우 강력한 관문과 방화벽으로 격리되어 있었다. 순수한 의도로 직원들의 24시간 업무를 도와주기 위해 핸드폰에 설치할 수 있는 그룹웨어를 만들어서 배포했을 때 회사의 고민도 거기에 있었을 것이다. 업무용 핸드폰을 모든 직원에게 지급해주기에는 열정이 조금 부족했는지 개인 소유의 휴대폰에 그룹웨어를 설치하게 해주고 싶었는데, 사내망이 아닌 보통의 인터넷망에서 사내망까지 도달하는 길이 절대 쉽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
"당신은 무슨 일을 하나요?"라는 질문에 대답하기란 항상 어렵다. 의도와 관점에 따라서 카멜레온처럼 바뀌는 게 우리 직업을 부르는 호칭이라서. 우리 일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는 "아, 그냥 컴퓨터일 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게 적당하다. 그런 사람들에게 개발과 운영의 차이 그리고 데브옵스 트랜드에 대해서 설명한 뒤 직업을 말하는 것은 매우 지난한 일이 될 테니까. 어차피 많은 사람에게 컴퓨터 두드리는 일이라면 다 똑같이 보이기 마련이다. 나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에게 무언가 허세를 부리고 싶다면 "프로그래머요"라고 대답하는 게 유리하다. 영어로 된 직업명이 가져다주는 미지의 매력이라는 걸 누릴 수 있으니까. 필연적으로 되돌아올 "프로그래머가 뭐예요?"라는 질문에 "프로그래머는 프로그래밍하..
생각은 깊게 하는 것이 좋다. 그것이 그대의 매력을 더해줄 것이니. 원숙하고 풍부한 영혼을 자랑할 수 있게 만들어줄 테니. 사려 깊고, 배려 깊고, 든든하고, 믿음직한 사람으로 보이게 해줄 테니. 그러니 보통은 생각을 깊게 하는 것이 좋다.나이가 그 사람의 깊이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그 나이를 살아오면서 어떻게 살아왔는가는 사람마다 다르니까. 얕은 생각 속에 즉흥적으로 살아온 30년과 깊은 생각 속에 주의 깊게 살아온 20년 중 어떤 사람이 더 깊이 있는 사람일지를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생각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 사람이라는 말은 바꿔 말하면 사람의 본질은 생각이라는 것이니까.깊이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많은 연습을 한다. 다르게 생각해보는 연습도 하고, 글을 쓰면서 생각을 정리하기도, ..
사람은 움직여야 한다. 뭐라도 해야 한다. 아무것도 못 하고 꼼짝 않는 사람을 비하하는 멸칭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면, 일어나서 뭐라도 해야 한다. 그렇게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을 동기(Motivation)라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이 동기는 자연 발생하거나 자가발전하는 것이 아닌지라 끊임없이 소모되고 또다시 채워 넣어야 할 필요가 있다. 더 이상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 사람은 버드런트 러셀의 표현을 빌리자면 재료 공급이 끊겨버린 소시지 기계만큼이나 무가치한 쇳덩어리에 불과해지는 것이다.무엇이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가? 무엇이 사람을 침대의 중력을 거스르고 두 발로 땅을 딛게 만들어서 사람답게 해주는가? 동기부여는 그렇게 순수하고 단순한 논제가 아니라서 많은 사람이 각기 다른 방법으로 설명하곤 한..
남의 이야기를 하기는 참 쉽다.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는 더욱더. 지레짐작과 단편적인 정보들의 조합이면 훌륭하게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를 재구성할 수 있으니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라는 비명은 다수의 합리적 의심 아래에 쉽게 스러진다. 하지만 이야기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글씨는 글을 이루고, 글은 이야기를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글씨를 잘 쓰는 법, 그 글씨를 잘 쓰기 위해 펜을 잡는 법 따위를 엄격하게 배운다. 그다지 엄하지 못한 집 안에서 자란 나는 펜을 대충 잡기 시작했고, 그 결과 엉망이 글씨체를 가지게 되었다. 매우 지저분한 한글 글씨체를 가지게 된 나는,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 자 인생 새로 시작하는 거야. 나는 한글을 포기하고 영어로 간다!는 마음가짐으로 알파벳 쓰는 법을 ..
퇴근길 지하철에는 옅은 술 냄새가 맴돌고 있었습니다. 그 기분 나쁜 냄새를 애써 무시하며 내 자리를 찾으러 두리번거렸습니다. 그러자 나와 상관없는 인생들의 얼굴이 수도 없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기분이 좋은 듯 보였고, 누군가는 심각했고, 누군가는 무표정했는데 정작 내 표정이 어떤지는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설레고 즐거운 표정은 아니었겠죠.평범한 일상이 설렘과 즐거움으로 가득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물론 저는 그런 방법을 알지 못했기에 무표정한 얼굴로 기댈 곳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딘가에 기대면 즐겁지는 않더라도 약간의 편안함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면서요. 하지만 안정적으로 목적지까지 앉아서 갈 자리는 고사하고..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던 저에게 비공식적인 의뢰가 하나 들어왔습니다. "홈페이지 하나만 만들 수 있어?" 미천한 저를 믿고 뭔가를 부탁한다는 사실에 무척 고무된 저는 제 실력과 상황을 따져보지도 않고 바로 "그럼요"라고 먼저 대답한 뒤 고객의 요구사항을 파악했습니다. "어떻게 만들어드릴까요?"보통 자신이 의뢰하고자 하는 개념의 실체를 잘 모르는 고객의 요구사항은 매우 추상적으로 단순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지어 그때의 고객은 '홈페이지'라는 단어를 발음하기조차 쉽지 않아 보였고, '요즘 그런 게 있다던데 하나 가져와 봐라' 정도의 느낌으로 의뢰를 줬기 때문에 저는 약간의 대화를 통해서 모든 요구사항을 제가 아는 지식과 기술의 범위로 끌고 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게시판 같은 건 필요 없고 그냥..
"가서 순찰로나 슬슬 한 바퀴 돌고 와"순간 본분을 잊고 "예?"라고 대답할 뻔했습니다. 아, 여긴 군대였지.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행정보급관님이 당직사관 완장을 차는 것을 도와드리며 되도록 평온한 말투로 되물었습니다."밖에 지금 비 내리기 시작한 것 같은데 말입니다""그러니까 한 바퀴 돌고 와야지. 길 얼마나 미끄러운 지도 확인해보고, 어디 무너진 곳 없는지도 좀 보고"잠시 창밖을 내다봤습니다. 해가 어둑하게 진 바깥에는 봄비가 아늑하게 내리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참으로 편안한 기분이 들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당직사관의 단호한 명령을 당직부사관이었던 제가 거부할 수는 없었습니다. "알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하고 복도로 나가서 근무명령서를 찾아봤습니다. 곧 지금 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