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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Everybody hates me

June 2018. 11. 7. 02:14

"가서 순찰로나 슬슬 한 바퀴 돌고 와"

순간 본분을 잊고 "예?"라고 대답할 뻔했습니다. 아, 여긴 군대였지.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행정보급관님이 당직사관 완장을 차는 것을 도와드리며 되도록 평온한 말투로 되물었습니다.

"밖에 지금 비 내리기 시작한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한 바퀴 돌고 와야지. 길 얼마나 미끄러운 지도 확인해보고, 어디 무너진 곳 없는지도 좀 보고"

잠시 창밖을 내다봤습니다. 해가 어둑하게 진 바깥에는 봄비가 아늑하게 내리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참으로 편안한 기분이 들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당직사관의 단호한 명령을 당직부사관이었던 제가 거부할 수는 없었습니다. "알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하고 복도로 나가서 근무명령서를 찾아봤습니다. 곧 지금 초소 근무자가 같은 생활관의 후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저는 다시 중대본부로 들어가서 굴러다니던 과자를 몇 개 챙긴 뒤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짧게 보고하고 막사 밖으로 나섰습니다.

막사 밖에서 잠시 손을 뻗어서 내리는 비를 가늠해봤습니다. 우산이 있었다면 펼쳤을 법한 비였지만 우산이 없다면 그럭저럭 맞고 돌아다닐 만한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우산이 없었던 저는 그냥 그대로 길을 나섰습니다.

순찰로는 6킬로미터 남짓한 산길이었습니다. 전역을 2달 앞두고 있었던 저는 그 순찰로에 어떤 계단이 어떤 각도로 흔들거리는지도 다 알고 있었고, 이 정도 비로는 별다른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난 2년간 경계 근무를 서면서 단 한 번도 당직사관이나 부사관이 순찰을 도는 것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냥 가파른 순찰로를 돌지 말고 위병소에 들어가서 근무자들과 잡담을 하거나 그냥 주변만 설렁설렁 돌아다니다가 들어가서 '한 바퀴 돌았는데 별문제 없었습니다'라고 보고하는 시나리오가 머릿속에 짧게 스쳐 지나갔습니다. 다들 그랬거든요. 하지만 전역을 얼마 남기지 않았던 저는 대부분이 그렇듯이 매우 넉넉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 마음을 그대로 산책하는 기분으로 바꾼 뒤 순찰로 입구로 향했습니다.

비가 쏟아지지는 않았지만, 오후부터 꾸준히 내렸던 탓에 순찰로는 진흙이 되어 한껏 질척거렸습니다. 되도록 돌멩이로 이루어진 디딤돌과 계단들만 밟으려고 조심하면서 가파른 길에 올라섰습니다. 근무교대를 위해서 올라갈 때는 시간에 맞춰야 했기에 거의 뛰어 올라가다시피 올라가느라 숨이 찼던 길이었지만 지금은 그냥 정말 한 바퀴 돌아보는 것이었고 천천히 제가 원하는 속도로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법 철망이 제대로 붙어있나 흔들어보거나 잘못 밟으면 미끄러질 만 한 부분이 없나 오르락내리락 할 정도의 여유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천천히 30분을 올라가자 17초소가 보였습니다. 가장 높은 곳에 있던 그 초소는 순찰로에 있는 수많은 초소 중 근무자들이 경계 근무를 서는 유일한 초소이기도 했습니다. 근무를 서고 있던 후임은 저와 기수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병장이었기 때문에 딱히 정석적인 수하 절차를 거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물어볼까 봐 오늘의 암구호 답어를 되뇌면서 초소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초소는 조용했습니다. 가장 높은 곳에 있었던 그 초소에서는 누군가가 걸어오면 도착하기 10분 전에는 그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고, 5분쯤 전에는 누구인지도 알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친했던 제가 걸어오는 것을 확인한 후임은 바싹 긴장한 부사수를 진정시키고 수하 절차를 생략했을 겁니다.

초소에 도착해서 위를 쳐다봤는데 딱히 사람 얼굴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뭐야 지금 저녁 8시도 안 됐는데 벌써 초소 안에서 자고 있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러면 올라가서 혼내야 했는데 저는 누군가를 혼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그냥 깨워서 과자나 주고 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초소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초소문을 연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초소에 아무도 없었던 겁니다.

순간 머릿속에서 이럴 때의 제가 취해야 할 절차가 떠올랐습니다. 초소 바닥에 있는 비상벨을 발로 밟는다. 그러면 오분대기조가 즉시 무기와 탄약을 챙기러 가겠지. 그리고 잽싸게 통신기를 연타해서 중대본부를 호출한다. 아마 중대본부에서는 사이렌이 울리고 있을 것이고, 누가 잘못 눌렀나 어리둥절하고 있을 테니 정확하게 상황을 보고한다. 현재 시간 7시 40분. 17초소에 근무자가 실종되었습니다. 별다른 사고 흔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오분대기조가 뛰어올라올때까지 기다렸다가 상황을 전달하고 내려간다.

저는 단 한 번도 이런 절차를 고민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초소가 비어있는 상황은 2년 동안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기계적으로 비상벨을 누르기 위해서 발을 들어 올렸다가 밟기 직전에 문득 하나의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혹시 사고가 난 게 아니라 근무조가 아예 올라오지도 않은 것이면? 이전 근무조에게 미리 시간 되면 내려가라고 했던 것이면? 지금 어딘가에 숨어서 쉬고 있었던 것이라면?

사실 별 상관없었습니다. 그래도 상황은 보고하고, 그 친구들을 찾아내서 징계를 받게 하는 게 맞는 절차이니까 이것이 사고이든 근무지 이탈이든 상관없었습니다. 오히려 저는 비가 내림에도 어디 숨어있지 않고 충실하게 순찰로를 돌고, 비정상적인 상황을 만났을 때 절차에 맞게 상황을 처리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표창장을 받을 수도 있었고, 마지막 휴가에 며칠 정도는 더 붙여서 나갈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요. 반대로 진짜 뭔가 사고가 났는데 이걸 누르지 않고 그냥 내려갔다면 저는 엄청난 징계를 받을 수도 있고요. 어떻게 봐도 비상벨은 누르는 게 맞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비상벨을 누르지 못했습니다. 대신 초소에 기대어서 그날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습니다.

그날은 수요일이었고, 수요일 오전에는 항상 정훈교육이 있었습니다. 뭐, 영상물을 시청하면서 군인정신을 다잡는 그런 시간이요. 그날도 식당에서 지루한 영상 시청이 있었고, 중대장의 설교 시간이 있었습니다. 소령 진급 심사를 앞두고 있었던 중대장은 뭐든지 열심인 사람이었고, 그래서 저희에게도 군인다운 정신과 군인다운 행동을 매우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여기 그 모범적인 사례가 있지 않냐며 중대원 중 누군가를 가리켰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손가락이 저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바로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잠시 뒤 슬며시 고개를 들었을 때 백 명에 가까운 중대원 중 상당수가 아직도 저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쳐다보는 중대원들 중 상당수가 경멸의 시선을 담아서 저를 쳐다보는 것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갑자기 뭔가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다시 고개를 숙이고 귀로만 중대장의 연설을 들었습니다. "그때 그 사건 있었을때 내가 아주 그 자식 영창에 보내려고 그랬어. 그런데 부대 분위기 흐트러질까봐 한 번 봐줬다고. 그렇다고 막 너네 근무지 이탈하고 그러면 영창 안 간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거야. 알았어?" 중대원들의 우렁찬 대답이 들렸습니다. "예!" 그리고 전 생각했습니다. 그 자식을 영창에 안 보낸 것은 부대 분위기를 염려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진급 심사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물론 속으로만 생각했고, 중대장의 연설은 계속되었습니다.

"저기 쟤 봐봐." 저였습니다. "아주 응? 동기가 잘못했는데도 그거 발견하자마자 바로 보고했잖아" 예, 제가 그랬습니다. "너네 그 상황에서 그럴 수 있어?" "아닙니다!" 뭐가 아니라는 걸까요. "군인이면 사사로운 감정보다는 원리와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알았어?" "예!" "그런 의미에서 원칙대로 처리한 이 친구한테 박수!" 그리고 저를 향한 경멸의 박수가 식당에 울려 퍼졌습니다.

그날부터 3일전, 아마도 새벽 2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을 겁니다. 부대에 전입해 온 지 얼마 안된 학사장교 출신의 소대장과 당직근무를 서고 있던 저는 후방 독립중대의 아무 일 없었던 지루한 밤을 달래기 위해서 열심히 소설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설에 완전히 몰입했던 저는 금세 한 권을 다 읽어버렸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읽고 3일 뒤에 있을 다음 근무시간에 다음 권을 읽을까 고민하던 저는 몇 분을 참지 못하고 역시나 다음 권을 당장 읽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당직사관이었던 소대장에게 잠시 위층 생활관에 올라가서 책을 가져오겠다고 보고하고는 중대본부를 나와서 생활관으로 올라갔습니다.

불침번 근무를 서고 있던 근무자가 올라오는 저를 보고 소리 죽여서 경례했습니다. 저는 경례를 대충 받아주고는 무슨 문제 있어서 올라온게 아니라 책 가지로 올라온 것이라는 말로 근무자를 안심시키고는 생활관으로 들어갔습니다. 생활관은 취침등만 켜져 있어서 매우 어두웠지만 저는 눈감고도 제 자리를 찾아갈 수 있었기 때문에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혹시나 자고 있는 사람들을 깨우지 않을까 조심하면서 제 자리의 관물대에서 원하던 책을 찾은 저는 조용히 생활관을 나왔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오려고 했습니다.

생활관 문을 닫으려던 저는 뭔가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다시 불침번에게 가서 근무명령서를 보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시간대의 근무자들 명단을 찾아보고, 다시 생활관에 들어가서 자고 있는 사람의 숫자를 세어봤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없어진 것이라면 문제가 심각했겠지만 다행히도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숫자가 한 명 더 많았습니다. 8명짜리 생활관에서 제가 빠지고, 근무자가 한 명 빠졌으니 6명이 자고 있어야 했는데 사람이 7명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다시 불침번에게 찾아가서 숫자가 왜 안 맞냐고 물어보자, 불침번이 무척이나 긴장한 표정으로 더듬거리면서 잘 모르겠다고 확인해보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알았다고 이야기하고는 꺼낸 책을 들고 중대본부로 내려갔습니다.

중대본부에 내려온 저는 컴퓨터에서 오늘 자 근무명령서를 다시 열어봤습니다. 그리고 근무자 이름을 다시 확인해봤습니다. 다시 확인해봐도 제 동기가 맞았습니다. 이걸 어떻게 해야하나 잠시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이 일이 제가 고민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근무자가 근무지를 이탈한 상황에서 그 근무자와 저와의 관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죠.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당직사관이었던 소대장에게 가서 살짝 자신 없는 말투로 이야기했습니다. "당직사관님, 확실하지는 않은데 지금 근무자가 근무를 안 나간 것 같은데 말입니다..." 당직사관은 부임한 지 2달이 안 된 전투력 넘치는 초임장교였고, 제 말을 듣는 순간 정말 번개같이 생활관으로 우당탕 거리며 뛰어 올라갔습니다. 저러다 중대사람들 다 깨우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데 누가 안 나갔다고 이야기도 안 했는데 누군지 알고 저렇게 뛰어가시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위층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무척 궁금했지만 중대본부를 비울 수는 없었기에 문을 열고 고개만 바깥으로 꺼낸 뒤 청력에 집중했습니다.

그리고 소대장이 불침번을 거의 죽일 기세로 추궁하는 소리, 생활관 문을 거칠게 여는 소리, 그리고 다시 불침번을 족치는 소리가 연속으로 들리고 다시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소대장이 중대본부로 뛰어 내려왔습니다. 그러더니 소대장은 통신기를 들고는 보일러실을 호출했습니다. 보일러실 근무자가 통신을 받자, 소대장은 "너 말고 옆에 있는 병장 바꿔라"라고 이야기했고 물론 그 병장은 보일러실이 아닌 위층에서 자고 있었기에 그 불쌍한 친구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상황 파악이 끝난 소대장이 다시 생활관으로 뛰어 올라가서 자고 있던 제 동기를 끌고 내려왔습니다.

그 이후 중대본부에서는 많은 소란이 있었습니다. 바로 옆에서 지켜본 제 감상으로는 소대장이 이 이벤트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침 해가 뜰 때까지 연관된 사람들을 불러서 취조해서 사건을 재구성하는 데 집중했거든요. 이 이벤트가 나와는 크게 상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저는 소대장이 소홀히 하고 있던 당직사관의 업무, 그러니까 근무자들의 보고를 받거나 총기함을 열어주고 닫는 등의 역할을 조용히 수행했습니다. 그러느라 가져왔던 책은 한 장도 읽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서 근무가 끝나자 생활관으로 올라가서 책을 관물대에 던져넣은 뒤 곧 잠들었습니다.

하지만 편하게 잠들 수는 없었습니다. 잠든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았을 때 누군가가 저를 깨웠습니다. 부대 행정병이었습니다. 지난밤에 있었던 사건의 보고서를 완성해야 하므로 내려와서 경위서를 작성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내려가서 A4 용지를 꺼내서 경위서를 작성했습니다. 어젯밤에 생활관에서 인원이 맞지 않는 것을 발견하여 소대장에게 보고했습니다. 어쩌고 저쩌고. 그리고 다시 올라가서 잠자리에 들었고, 여러 사람들의 진술과 제가 제출한 경위서 등을 바탕으로 근무에 나가지 않았던 제 동기의 징계가 결정되었습니다. 한 달간 매일매일 완전군장으로 연병장 30바퀴. 기록에 남지도 않고 크게 힘든 것도 아니었지만 조금 부끄러울 수 있는 징계였죠.

그 사건이 있고 3일 뒤, 정훈교육이 끝나자 이제 모든 사람이 이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었습니다. 생활관으로 올라가고 있는데 다른 동기 하나가 저를 찾아와서 화난 말투로 물었습니다. "야, 그거 네가 말한 거였어?" "어?" "그때 걔 근무 안 나간 거 소대장한테 말한 게 너였냐고" "어..." "왜 그랬어?" 안 나간 것을 안 나갔다고 이야기했는데 그 이유를 물어보면 뭐라고 해야 할까요?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어서 가만히 있자 동기가 화난 표정으로 그런 식으로 살지 말라는 등의 몇 마디를 더하고 생활관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 지나가던 후임이 지나가는 말투로 이야기했습니다. "아니, 병장님. 중대 뒤집으려고 작정하셨습니까?" 그리고 다른 지나가던 선임, 그러니까 전역이 며칠 남지 않은 말년병장이 저를 보더니 누가 봐도 과장된 표정으로 낄낄거리면서 어깨를 치고 화이팅을 외치며 지나갔습니다. 그 순간 알게 되었습니다. 아, 다들 나를 싫어하게 되었구나.

초소 위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다시 한번 생각했습니다. 지금 이 비상벨을 누르면 사람들이 나를 더 싫어하게 되겠지. 나는 그냥 지금 상황에 가장 맞는 행동을 한 것이지만 오해가 쌓이고 이상한 이미지가 생기겠지. 앞으로 근무가 빡빡해지고 규정이 강화되겠지. 순찰도 자주 돌게 될거고.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이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겠지. 그냥 조용히 내려가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갈 텐데.

그날 낮에 느꼈던 수많은 경멸이 떠올랐던 저는 끝내 비상벨을 누르지 못하고 초소를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뛰어가는 듯한 걸음걸이로 미끄러운 순찰로를 내려왔습니다. 포장된 길에 들어서서 막사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습니다. 누구지 하고 뒤를 돌아보니 익숙한 실루엣들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사라졌던 근무자들이었습니다.

그 친구들도 저를 발견하고 살짝 당황했던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들도 병장들이었기에 곧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넉살 좋은 웃음과 함께 저를 향해 걸어왔습니다. "허허허, 형 여기서 뭐 하세요?" 빗줄기가 제법 굵어져서 시야를 방해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비를 맞으며 그 친구들이 조금 더 가까이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들이 충분히 가까이 오자 속삭이듯이 이야기했습니다. "너네 뭐냐?" "예? 허허허 왜 그러십니까?" "나 지금 17초소에서 내려오는 길인데" 순간 그 친구들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습니다.

사실 저도 더 할 말은 없었습니다. 지금 나랑 같이 가서 보고하고 징계받자. 라고 이야기할 수 없었거든요. 물론 그 친구들도 할 말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비를 맞으며 아주 잠시 침묵했습니다. 아무래도 침묵을 깨는 것은 선임인 제가 할 일이라고 생각해서 나지막이 이야기했습니다. "너네 내가 오늘 오후에 무슨 소리 들었는지 알고 있어?"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곧 그 말을 꺼낸 것을 후회했습니다. 제가 무슨 소리를 들었건 이 상황과 무슨 상관이 있었을까요. 저는 곧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이야기했습니다. "나 먼저 들어갈 테니까 몇 분 있다가 들어와서 보고해" 그리고 몸을 빙글 돌려서 막사로 들어갔습니다.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으로 중대본부에 들어가서 당직사관에게 순찰로는 멀쩡하고 별일은 없었다고 보고를 했습니다. 방금 목욕을 마친 강아지처럼 중대본부 여기저기에 물방울을 뿌리면서 한 보고였기 때문에 당직사관님은 그 말의 진실성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중대본부에 들어갔을 때 제 모습을 보고 기겁을 하면서 달려나갔던 행정병이 가져다준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있으려니 근무자들이 들어왔습니다. 근무자들은 절도 있는 모습으로 근무 중 아무 이상이 없었음을 보고했고, 당직사관은 절도있게 보고를 받으며 어서 들어가서 쉬라고 했습니다.

총기를 반납하고 나가려던 친구들에게 과자를 던져주며 수고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친구들은 고맙다는 말도 없이 과자를 받아서 중대본부를 나갔습니다. 곧 할 일이 없어진 저는 자리에 앉아서 제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많은 일에 대해서 생각해봤습니다. 그리고 모든 상황을 종합해본 결과 한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아, 나는 사회로 돌아가서도 정말 인기 없는 인생을 살겠구나. 그 결론을 받아들인 저는 곧 체념하는 마음으로 저번에 읽지 못했던 소설책을 마저 읽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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