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샌디에고에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퇴근할 때만 되면 항상 비가 딱 기분 나쁠 정도로 내리던 시애틀에 머물고 있던 저는 말로만 듣던 '캘리포니아 날씨'와 '남부 해안가 날씨'를 모두 경험할 수 있는 도시, 미국의 대표적인 휴양도시이자 은퇴한 부자들이 많이 사는, 미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라는 평을 받고 있는 샌디에고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습니다. 트로피컬 하우스로 가득 채운 플레이리스트를 재생시키며 샌디에고에 도착한 저는 애시드 재즈가 어울릴만한 '비 내리는 샌디에고'를 목격하고 다소 당황했고, '샌디에고에는 1년에 비가 하루 이틀 정도만 오는데 그걸 봤으니 이거 참 진귀한 경험 아니겠냐'라고 떠드는 우버 드라이버의 말에 다소 우울해졌습니다. 차 안의 분위기가 비 내리는 파이크 플레이스 만큼이나..
무언가 잘 안 풀리는 코드를 계속 들여다보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핸드폰이 짧게 울리면서 알림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습니다. 제 인생 패턴을 기준으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오후 8시 이후에 오는 알림은 보통 언제 가입했는지도 모를 사이트에서 보내는 별 의미 없는 메일들, 누군가가 내가 편집했던 문서를 업데이트했다는 알림, 어딘가의 단톡방에 전달된 의미 없는 신문 기사들이 대부분이었기에 저는 아무런 설렘이나 기대 없이 기계적으로 알림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핸드폰을 들어 올리자마자 눈에 들어온 메시지는 제 예상을 벗어나는 것이었고, 뭔가 심장이 뛰는 듯한 느낌을 들게 해 주었습니다. 실제 메시지는 매우 사무적이었지만 제가 읽었을 때의 감상으로 번역해서 다시 작성하자면 대충 이런 메시지였습니..
갑자기 옛날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우리나라에 도로명주소가 도입되었을 때 이것이 편하냐 불편하냐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저는 도로명주소를 무조건 사용하도록 강제하고 더불어서 지번주소는 아예 이 세상과 전산시스템에서 소멸시켜야 한다는 매우 급진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도로명주소의 사용이 강제되면 아무래도 예상치 못한 주소 때문에 DB 칼럼을 비효율적일 정도로 크게 잡아야 하는 일도, '샵'을 '샾'이라고 써서 저장한 사람들에게 EUC-KR로 인코딩 된 우편 전문이 오류를 일으켜서 편지가 반송되는 일도 없을 거고 언제나 답 안 나오던 주소 입력 UI도 확 바뀔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체계적이지 않은 우리나라의 도로 사정에 체계성을 기반으로 한 도로명..
제가 이것저것 많이 사용해봤기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 들어간 이어폰이나 헤드폰에 너무 큰 기대를 하지 마세요. 노이즈 캔슬링의 원리는 간단합니다. 주변에서 나는 소음의 정확히 반대되는 소리를 같이 내서 소음을 상쇄시켜서 0으로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아마 푸리에 변환을 배우셨거나 뿌요뿌요를 해보셨으면 대충 이해가 가실 원리입니다. 하지만 노이즈 캔슬링에는 물리학적인 한계가 분명히 있습니다. 노이즈 캔슬링 기기들은 자체적으로 마이크를 가지고 있어서 주변 소리를 듣고 그 반대되는 소리를 생성해주는 원리를 가지고 있는데, 소음이 이어폰이나 헤드폰을 지나서 내 귀에 도달하기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 그 계산을 다 해서 상쇄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노이즈 캔슬링..
비행기가 이륙이나 착륙을 할 때 승객들이 지켜주고 협조해야 하는 규칙이 몇 가지 있습니다. 자리에 앉고, 안전벨트를 매고, 등받이를 똑바로 올리고, 테이블을 접고, 인생을 돌아보고 유언을 준비하는 등의 보편적인 규칙에서부터 입국신고서와 세관신고서를 챙기고, 승무원에게 말을 걸지 않고, 브레이스 포지션을 머릿속에서 연습하고, 창문을 열어두는 등의 상황에 따라 지켜야 하는 규칙들이 그것입니다. 특히나 저는 마지막 규칙에 대해서 혼란을 많이 겪었습니다. 항상 국적기만 타던 저는 이륙이나 착륙 전에 창문을 열어두고 엔진에 불이 나지는 않았는지, 플랩은 제대로 움직이는지, 리벳에 나사 하나가 덜렁거리지는 않는지 등을 체크하고 이상이 있으면 승무원에게 알려주는 것이 창가에 앉은 사람의 의무이며 많은 사람의 생명을 ..
정말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차를 몰고 가던 드라이버가 저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우버에 탄 지 20분이 지난 시점의 일이었습니다. 아무런 대비가 되지 않았던 저는 방금 드라이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당황해 버려서 'what?'도 아니고 'um?'도 아닌 'egh...?' 정도의 웅얼거림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드라이버가 조금 더 길고 느리게 뭐라 뭐라 말을 했습니다. 여전히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 말에서 분명한 성조를 느낄 수 있었던 저는 4년 전 중국 출장 때 외워두었던 '저는 중국어를 할 줄 모릅니다'라는 재귀적인 중국어를 떠올리려고 애썼습니다. 하지만 어림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여기는 미국인데 왜 내가 중국어로 질문을 받고 중국어로 대답을 하지 못해서 ..
보통 나에게 안경테를 고르는 일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어울리는 테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뭐, 대충 고르면 되는 거지. 하지만 안경렌즈를 고르는 것은 항상 어려운 일이었다. 구면? 비구면? 인덱스는? 코팅은? 초점거리는? 안경테를 고르는 것이 보통은 디자인을 위시한 정성적인 가치들이 크게 작용하는 일이라면, 안경렌즈를 고르는 것은 정량적인 가치가 크게 작용하는 일이었다. 인덱스가 높을수록 렌즈는 얇아진다. 구면 렌즈보다는 단면 비구면 렌즈가 더 선명하고, 양면 비구면 렌즈는 최고다. 자외선 차단 코팅은 거의 모든 렌즈에 기본으로 들어가 있는 것이니 신경쓸 것이 없다. 언제나 논리적이고 개연성 있는 흐름을 좋아하던 나에게 정량적인 선택은 쉬운 것이어야 했다. 하지만 안경렌즈를 고르는 ..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이,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다른 사람 앞에서 무언가를 해야 할 때면 나는 잘하는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고, 혼자 멍하니 생각에 잠길 때면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망상 속에 존재하는 나의 천재성을 현실 세계로 끄집어내면, 물에 빠진 고양이나 물 밖에 나온 산갈치처럼 볼품없어지니까 현실적으로는 잘하는 게 하나도 없는 쪽에 가까운 것 같다. 몇 년 전에 내가 잘하는 것이 정말 하나도 없구나라고 느끼게 했던 일이 있었는데, 인공지능을 공부할 때였다. 컴퓨터로 뭔가 벌어먹는 사람들에게 알파고가 준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빌어먹어도 컴퓨터로 빌어먹어야 했던 나에게 딥러닝은 가치관을 흔드는 충격이었다. 아, 내가 23년 동안 갈고닦은 프로그래밍은 이제 다 의미 없어지겠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