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그러니까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상을 바꾸기 직전 가을 무렵의 점심시간이었습니다. 당시에 저는 왜 미국인들은 샌드위치에 채소를 넣어서 먹을 생각을 하지 않는가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데리야끼 소스를 뿌린 치킨 샌드위치와 사투를 벌이고 있었는데, 옆에서 같이 밥을 먹던 미국 동료가 저에게 뭔가를 물어봤습니다. 신선함과 아삭함이 부족한 식단이 한 달 넘게 계속되는 것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던 저는 영어에 대한 스트레스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테이블의 대화에는 별로 집중하지 않고 있었기에 질문을 놓치고는 음.. 미안한데 뭐라고?라고 되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 전혀 알 수 없었던 '네가 가장 좋아하는 픽사 영화가 뭐냐'라고 물어보는 질문에 대해 대비 없이 반사적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
원래 버그 수정이라는 게 다 그렇습니다. 잘 풀리면 10초 만에도 풀리지만, 안 풀리면 열흘을 붙잡고 있어도 안 풀리지요. 물론 할 일이 많은 저희가 안 풀리는 버그 수정 하나에 열흘씩 소모하는 것은 옳지 않으므로 그 계획 수립과 실행에 신중해야 함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크 테마보다도 더 어두운 제 상황을 돌아보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 소모시간에 대한 올바른 예측, 시급성과 영향도를 고려한 우선순위 결정, 예상과 다른 상황이 벌어졌을 때의 대처가 버그 수정의 진선미라면 제가 하고 있는 것은 예측, 결정, 대처에 모두 실패한 버그 수정의 모범적인 위악추가 아닐까. 실전 프로젝트에서의 버그 수정은 일종의 타워 디펜스와 같은 양상을 보일때가 있습니다. 일정과 상황에 따라서 버그는 천천..
새벽 4시쯤에 가만히 누워서 감각이 없어진 듯한 손바닥의 어제(魚際) 부분을 만져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미한 수준의 화상과 경미한 수준의 동상은 쉽게 구분하기 어렵겠구나. 저는 두 달 전쯤에 전기 주전자의 공격을 받고 같은 부위에 약한 화상을 입고 약하게 고통받았던 기억이 있었는데, 그때와 비슷한 통증이 느껴졌거든요. 그렇다면 앞으로 일주일 정도는 미약한 통증이 함께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며 이 모든 것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을 했습니다. 오후 4시는 뭔가를 새로 시작하기에는 늦은 시간이고, 그렇다고 뭔가를 마무리하기에는 또 너무 이르기에 참 애매한 시간입니다. 특히나 요일이 금요일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금요일 오후 4시쯤에 대충 하던 일이 정리가 되면 새로운 일을 ..
세상에는 가까이 붙어 있으면 안 되는 단어들이 몇 개가 있습니다. '혈액형'과 '성격'이라든지, '음이온'과 '건강'이라든지, '지구'와 '평면'이라든지, '파인애플'과 '피자'라든지. 물론 이런 단어 조합에 대해서는 각자의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이견을 가지지 않을 보편적으로 부자연스러운 단어 조합이 최근에 생겼는데, 바로 '코로나'와 '덕분에'입니다. 무언가의 원인으로써 코로나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면 그다음에는 반드시 '때문에'가 와야지 '덕분에'가 붙으면 잘못 사용한 자리토씨를 보는 것만큼이나 어색하고 이상한 기분이 들거든요. 그만큼이나 '코로나 때문에'를 던지고 남은 문장을 완성하라고 하면 다들 할 말이 무척 많을 겁니다. 그만큼이나 2020년은 모두에게 전에 없을 만큼 힘..
모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평화로운 주말 오후였습니다. 앉아서 쉴 수는 있었지만 누워서 쉴 수는 없었던 애매한 계급이었던 제가 어정쩡한 자세로 앉아서 책을 세네 장 정도 읽었을 때, 누군가가 급하게 뛰어올라와서 저를 찾았습니다. 중대장님이 찾으시니까 빨리 중대본부로 가보라는 겁니다. 영외 중대였던 저희 부대는 기본적으로 간부들이 평범한 회사원처럼 자가에서 출퇴근을 하는 것이 기본이었고, 중대장님도 주말에는 부대에 안 계신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대장님이 주말에 출근을 하는 상황은 일반적이 아닌, 그러니까 뭔가 문제가 생긴 상황이었고 보통 그런 소식은 매우 빠르게 전파됩니다. 그래서 저는 중대장님이 출근하셨다는 소식보다 나를 찾으신다는 소식이 먼저 들렸다는 사실에 심각한 불안감을 느끼..
상상이라는 말이 어색하게 들리는 시대입니다. 원하는 것은 뭐든 빠르고 자세하고 직접적으로 구할 수 있는 시대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부터 '상상력을 자극하는'이라는 말이 별로 칭찬의 수사가 되지 못하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언젠가 국내 검색엔진 점유율을 찾아봤을 때, 유튜브의 비율이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높아서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세상에 유튜브가 검색엔진인 것을 인정해야 한다면 언젠가는 HTML이 프로그래밍 언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끔찍한 시대가 오는 것은 아닐까 싶었으니까요. 저는 문자로 된 정보가 훨씬 습득이 빠르다고 생각했는데, 많은 사람들은 영상으로 된 정보가 훨씬 정확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생각해보면 게임의 막히는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서 Walkthrough 영..
저는 세상에 나쁜 책은 별로 없다는 주장에 보통 동의하는 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점을 지배하고 있는 자기 계발서들은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편입니다. 세상에 나쁜 책이 별로 없다는 말은, 실제로 나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라고 할지라도 반면교사로 삼을만한 가치는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보통 자기 계발서들은 반면교사로 삼을 만큼 비판하고 싶은 주장을 담고 있는 경우도 별로 없고, 교사로 삼을 만큼 유익한 내용이 있는 경우도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자기 계발서는 아주 오랫동안 국내 출판계를 지배했습니다. 언제나 서점을 가면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비슷한 부류의 책들이 네트워크 효과를 발휘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었습니다. 어떨 때는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라는 유..
글을 쓰기 위해서 에디터를 열면 처음 보이는 것은 하얀색의 광활한 여백입니다. 그 여백을 빽빽한 이야기로 채우는 것은 언제나 쉽지 않은 일이고, 특히나 적절한 첫 번째 문장으로 운을 떼는 것은 그 글의 운명을 좌우할 만큼 중요하기에 언제나 고민이 많은 일이기도 합니다. 저는 보통 적절한 첫 문장이 생각나지 않으면 그냥 습관적으로 '언제'라든지 '어디에서'로 시작을 하는 것을 좋아하고 보통은 그 두 가지를 섞어서 시공간을 담고 있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것을 가장 좋아합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LA에 있었을 때의 일이었는데'로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LA 국제공항에서 순두부때문에 마약 단속에 걸린 이야기로 이어갈 수 있고, 이렇게 일단 시작하면 처음 3~4 문단을 아주 쉽게 써 내려가면서 생긴 가속으로 마무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