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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나의 의미

June 2019. 4. 21. 15:49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이,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다른 사람 앞에서 무언가를 해야 할 때면 나는 잘하는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고, 혼자 멍하니 생각에 잠길 때면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망상 속에 존재하는 나의 천재성을 현실 세계로 끄집어내면, 물에 빠진 고양이나 물 밖에 나온 산갈치처럼 볼품없어지니까 현실적으로는 잘하는 게 하나도 없는 쪽에 가까운 것 같다.

몇 년 전에 내가 잘하는 것이 정말 하나도 없구나라고 느끼게 했던 일이 있었는데, 인공지능을 공부할 때였다. 컴퓨터로 뭔가 벌어먹는 사람들에게 알파고가 준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빌어먹어도 컴퓨터로 빌어먹어야 했던 나에게 딥러닝은 가치관을 흔드는 충격이었다. 아, 내가 23년 동안 갈고닦은 프로그래밍은 이제 다 의미 없어지겠구나. 그래, 이 기회에 개발자라는 직업은 과감히 포기하고 원래 계획이었던 귤 농사나 지으러 가자. 도망친다고 생각하지 말고 미래를 20년 앞서갔다고 생각하자.

하지만 농사지을 땅도 그 땅을 살 돈도 없었던 나는 결국 개발자라는 직업을 포기하지 못했고, 대신 귤나무 묘목 50개 정도를 살 수 있는 돈을 투자하여 사설 학원에서 인공지능을 배웠다. 대충이라도 배워두면 나중에 인공지능이 세상을 지배했을때 9급 인공지능 어시스턴트 자리 같은거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간만에 회사 돈이 아닌 사비를 투자해서 공부를 한 덕분에 집중력은 높았고, 곧 나는 이대로만 열심히 공부하면 스카이넷이나 울트론은 아니더라도 빅스비 정도는 만들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자신감은 추상적이고, 자신 없음은 현실적이었다. 막상 인공지능과 관련된 과제를 하거나 시험을 볼 때면 나는 인공지능은 커녕 지능도 없는 게 아니냐는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역시 나는 클래시컬한 프로그래밍, 그러니까 열심히 스택 오버플로우에서 건진 소스 코드를 내 프로젝트에 붙이면서 제발 이것이 돌아가기를 기원하는 그런 것들이 어울리지 않을까. 아니면 그냥 개발 서버에 접속해서 톰캣 설정이나 고치는 게 어울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한 10년 뒤 부장이 되었을 때 인공지능에 대해 아는 척 - 나 때는 말이야, 신경망 레이어 하나하나를 다 손으로 설정했다고 - 을 할 기회를 완전히 포기했다. 그리고 학원비로 귤나무 통장이나 만들었으면 노후에 도움이 되었을 텐데 라고 후회하면서, 그냥 내가 잘하는 것들에 정진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톰캣의 세션 클러스터링 설정 하나 똑바로 못해서 쩔쩔매고 있으려니 세상에 내가 잘하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 분명하다는 합리적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최근에 나는 정말 잘하는 것이 하나도 없이 엉망이라는 생각이 너무 심해져서 나를 죽일 지경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나의 삶에 대한 강한 의지가 이지스처럼 방어기제를 살포하기 시작했고, 그 덕분에 나는 내가 그래도 평균적인 기대치보다 잘하는 것들이 꽤 있음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일회용 인증번호가 문자로 왔을 때, 대체로 한번 슬쩍 보고는 오타 없이 입력할 수 있다. 만약 엑셀과 풀배열 키보드가 주어진다면, 오일뱅크, S-Oil, GS칼텍스 등 각기 다른 회사의 전표 100장에 적힌 수입량을 1분 이내에 합산할 수 있고 1분 30초 이내에 검산도 할 수 있다. 프리미어와 파이널 컷을 모두 사용할 줄 알며, 나눔 고딕과 나눔 바른 고딕을 구분할 줄 안다. 평범한 도시라면 30km 정도는 불평 없이 걸을 수 있으며, NBA 2K에서 크로스오버에 이은 스탭백 3점 슛을 쏠 수 있다. 그리고 숨을 참은 상태로 이진트리를 구현할 수 있는데, 나는 특히 마지막 장점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말랑말랑한 방어기제로 여린 영혼을 둘둘 감은 미쉐린 같은 모습이 되어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생각하는 나의 장점이라는 것은 모두 인공지능이 조금만 발달하면, 아니 어느 연구실에서는 지금도 당장 인공지능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들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인공지능들은 인간적인 관계 때문에 지치지도 않을 테고, 언제나 끊임없이 발전할 테니 적어도 이 세상에는 나보다는 그 미지의 신경망들이 더 의미 있는 존재가 아닐까.

결국 스스로의 무의미함과 무가치함에 질려버린 나는 그냥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훨씬 더 열심히 노력해서 눈을 감고도 AVL트리 정도는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되려고 하기보다는, 그냥 가만히 앉아서 초인공지능의 등장을 기다리기로. 그렇다면 언젠가는 나를 아득히 뛰어넘은 그 무언가가 나의 의미를 찾아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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