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지하철은 어느 때나 붐비는 편이지만, 명절이 되면 상대적으로 한산해집니다. 어느 설날 오전의 지하철도 평소보다 빈자리가 많았습니다. 적당한 자리에 앉아서 인터넷 곳곳에 올라오는 명절 피해사례들을 읽고 있었는데 갑자기 핸드폰에 깔아 두었던 업무용 메신저가 울렸습니다. 휴일에 업무용 메신저가 울리는 것은 공포영화의 도입부에서 별로 비중 없던 캐릭터가 주변을 살펴보겠다며 혼자 나가는 것만큼이나 불길한 일이었기 때문에 저는 대범한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하면서 메신저를 열고 메시지를 확인했습니다.역시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메신저에는 운영 중인 서버가 다운되었다는 다급한 메시지가 가득했습니다. 바로 두통이 찾아오지는 않았지만, 두통이 찾아올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저희 일에서 '운영'이라는 단..
새벽 5시 무렵에 집을 나서는 기분은 보통 좋을 수가 없을 겁니다. 그 시간에 집에서 나오기 위해서 일어나야 하는 시간을 생각해보면 더더욱이요. 평소라면 잠들 시간에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하는 것은 유쾌한 기분일 수가 없겠죠. 그런데 그날 새벽 5시 30분에 집을 나서서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제 기분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조금 설레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영화가 개봉하던 날이었거든요.저는 항상 기다렸던 영화는 가능한 가장 좋은 극장에서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보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았던 극장은 천호동에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회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에 저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출근하거나, 퇴근한 뒤 영화를 보고 집에 갈 때가 많았습니다..
제가 취업을 준비하기 위해서 자기소개서를 열심히 쓰고 있을 때였습니다. 보통 IT 계열의 자기소개서는 질문의 형태는 달라도 대충 '네가 얼마나 팀 단위로 일하는 것에 익숙하고 잘하는지 말해봐라' 식의 질문이 보통 하나씩은 있었습니다. 회사에 들어오고 나서 보니까 아무래도 팀 단위로 일하는 것을 힘들어하는 사람은 본인도 같이 일하는 사람도 괴로운 경우가 많아서 그런 걸 물어봤던 것 같습니다.저는 그런 부류의 질문에 꼭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팀 프로젝트가 있는 전공과목에서 단 한 번도 A+를 놓친 적이 없습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물론 거짓말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앞으로 제가 수십 년간 일할 수도 있는 회사와의 첫 연결에는 정직과 신뢰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진에 포토샵도..
오늘도 잠은 제시간에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마 내가 잠을 초대한 시간과 잠이 나에게 오기로 결심한 시간 사이에 작은 오해가 있었나 봅니다. 커뮤니케이션의 오류는 김치의 굴 만큼이나 잊을만하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편한 마음으로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다만 이 시간관념 없는 친구가 아침에는 가야 할 때를 모르고 계속 있을까 봐 그게 조금 걱정이었습니다.불면증을 해결하기 위한 해결책이 몇 가지 있습니다. 특히나 약물이나 요란한 의식 없이 해볼 수 있는 해결책은 대부분 시도해본 적이 있었습니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머릿속에 가상의 울타리를 만들고 거기를 뛰어넘는 양을 세는 방법은 어떨까요? 예전에 1024마리까지 세어도 잠이 안 와서 포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찾아보니까 한국어로 세면 효과가 별로 ..
매일같이 걸어가는 퇴근길을 걸을 때는 그 익숙함이 마음에 살짝 틈을 열어줍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괜찮고 주변의 풍경과 소리에 특별함이 없기에 걸음을 반쯤은 무의식의 영역에 맡길 수 있습니다. 그렇게 나를 반자율보행 상태에 진입하게 만들고 얻은 머릿속의 여유에 다른 생각들을 반쯤 집어넣고 흘러가게 놔둡니다. 그 생각의 흐름이 잠시 멈추면 음악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다시 이런저런 생각이 흘러가기 시작하면 그 흐름에서 의미 있는 생각들을 찾아다니다가 곧 음악 소리를 잊어버리게 됩니다.그렇게 만들어진 주관적인 세계의 흐름에서 주변에 스쳐가는 다른 사람들과 자동차들, 건물들, 불빛들은 대부분 무시됩니다. 무시당하지 않는 것들은 뭐가 있을까요? 아마 타이밍 좋게 바뀌는 횡단보도의 빨간 신..
정말 가차 없는 상황이었어요. 새 프로젝트에 들어온 지 15일밖에 안 지났는데 다른 프로젝트를 시작해야 한다는 거에요. 너무 당황스러워서 되물었죠. '제가 여기 리더인데 나가라구요?' 그래도 상황이 급해서 바꿔야 한대요. '그러면 여기 후배들은 누가 챙겨줘서 프로젝트를 진행하죠?' 그건 천천히 생각해보겠대요. '어..근데 저 지금 이 프로젝트 회의 들어가야되는데 가지 말까요?' 근데 또 그건 일단 들어가라고 하더라구요. 황망하게 지하철을 타고 회의를 하러 갔어요. 프로젝트가 막 시작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 회의는 앞으로 프로젝트를 어떻게 잘 진행해볼까에 대한 회의였어요. 미래와 비전을 이야기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짰어요. 그러니까 예비부부들이 하는 그런 거요. 그래서 전 그 자리에서 예정된 이별에 대해서 ..
I don't know what stressed me first or how the pressure was fed. 난 뭐가 나를 스트레스받게 만들기 시작했는지도, 이 압박감이 어디에서 오는지도 잘 모르겠어. 2017년 4월 9일 23시 20분 가방검사를 마치고 보안직원과 마음속으로 인사를 나눈 뒤 회사 건물 밖으로 나섰다. 해는 3시간 53분 전에 사라졌고 달빛이나 별빛이 잠실 하늘을 비춰주지는 않으니, 나는 온전히 가로등 불빛과 가끔 지나다니는 차들의 헤드라이트에 의지해서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잠실역의 2호선 막차 시간은 24시 21분이니까 삼보일배를 하면서 가도 늦지는 않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막차가 끊겨서 택시를 타고 퇴근하는 그런 불행한 일은 원치 않았다. 건물 밖을 나서서 몇 걸음을 걸었..
안녕하세요? 이런 메일을 드리게 되어서 정말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에게 좋은 말을 해주는 것도, 나쁜 말을 하는 것도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기에 선한 의도의 비판이나 악의가 숨어있는 칭찬 같은 복잡한 기술을 가진 글쓰기는 어려워하는 편입니다. 그렇기에 잘 돌려서 기분나쁘지 않게 의도를 전달하는 것도 솔직히 말씀드리면 별로 자신이 없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예쁘게 전달하지 못하는 것은 제 부덕의 탓이니 그점에 먼저 사과를 드리고 시작하고 싶습니다. 몇 년 전에 클래스의 명명을 가지고 논쟁이 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 제 기억이 맞다면 ID Generator를 IdGenerator로 써야 되냐 IDGenerator로 써야 되냐를 가지고 싸웠던 것 같습니다. ID는 영어 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