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가 오픈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었다. 프로젝트를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숫자들이 완성에 가까워지고 있었고, 프로젝트에 속한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반죽음 상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의심할 여지 없는 오픈 직전의 상태였다. 사실 오픈 직전의 상태라는 표현은 돌잔치에 가서 아기한테 '어이구 이제 다 컸네!'라고 말하는 것 만큼이나 객관적인 상태와 동떨어진 감정적인 표현이었다. 당시에 막 2년차를 넘어서 3년차 개발자라는 수식어가 붙었던 나는, 이전 프로젝트들에서 오픈 혹은 그와 비슷한 이벤트를 경험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오픈에 임박해가면서 점점 급박해지고 리얼해지는 주변 상황이 마냥 신기하기만 했었다. 결함이 쏟아져 나오는 상황도, 주말에 쉴틈없이 배달되는 피자와 쌓여있는 컵라면 들도, 30분이 ..
Tool. 도구. 인간이 무언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 동원하는 것. 우리의 아득한 조상님들이 나무를 자르고 사냥을 하기 위해 갈고 던지고 꽂았던 돌덩어리들부터 시작해서 내가 출근하자마자 제일 먼저 실행하는 이클립스에 이르기까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것이자 동시에 우리가 다른 동물들에 비해서 눈부신 발전을 이루게 해준 가장 큰 원인 중 하나. 도구를 쓰는 동물이 인간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을 제외한 그 어떤 동물들도 이클립스 같은 도구를 상상하지 못 을 것 같다. Type. 타입. 일정한 기준으로 나누어진 분류. 세상의 모든 개념들은 기준에 따라서 하나로도, 두 개로도, N개로도 구분할 수 있다. 학교에서 대수학(Algebra)을 배울 때였는지 정수론(Number Theory)을 배울 때..
제가 신입사원때는 신입사원은 원래 일을 많이 받는 것인가 고민하던 시기가 잠깐 있었어요. 에어컨이 냉방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환기의 의무만 수행하기로 결심한지 4시간이 넘은 한 여름의 사무실은 정말 더웠고, 그래서인지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단순 반복 코드를 치고 있었기 때문에 생각하는 속도와 거의 비슷한 속도로 키보드를 두드리면서도 지금까지 일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이 일을 못 해서 남아있는 것인가 일을 잘 해서 남아있는 것인가 고민할 정도의 여유는 있었지요. 근처에 다른 신입사원들이 있었으면 너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니 라고 물어봤을텐데 아쉽게도 물어볼 사람들은 더위를 견디지 못하고 - 혹은 일이 없어서 집에 먼저 간 상태였어요. 저기 뒤에 있는 저 분한테 한 번 물어볼까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바깥이 밝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매 년 새해에도, 해가 바뀔 때도 자는 것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해서 별로 챙겨서 보지 않던 일출을 회사에서 보게 되니 감격스러워 해야 될 것만 같은데 기분은 창 밖의 풍경처럼 어스름하기만 했다. 회사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것이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3번은 넘었던 것 같고 5번은 안 된 것 같은데, 이제부터는 몇 번째인지 궁금해하는 것도 그만두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7시간 전, 시계는 11시를 막 넘겼고 아직도 퇴근하지 않은 사람은 드물었다. 아무리 악성 프로젝트라고 하더라도 다음 날이 휴일이고 연휴이면 일찍 일찍 퇴근하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니까, 슬슬 선택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당장..
1 신입사원 시절의 일이었어요. 보통 일을 할때는 자기가 하는 일의 사이즈를 잘 측정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데, 여태까지 해온 일들과 남은 일들의 사이즈를 잘 파악하고 자신의 속도를 잘 알고 있어야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지연되고 있는지, 이것이 이슈화 될 정도로 늦어지고 있는 것인지 내가 조금 더 속도를 내면 어떻게든 맞춰볼 수 있는지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고 관리 측면에서는 이것보다 중요한 일이 없기 때문이죠. 불이 나더라도 초기진화가 중요한 법이고 암에 걸려도 초기에 발견하면 완치율이 올라가듯이 이슈도 초기에 파악하면 적절하게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것이잖아요. 날씨가 더워지는 정도를 넘어서서 짜증스러워지는 정도에 도달했던 한 여름, 일이 많아서라기 보다는 에어컨 때문에 벗어날 수 없었던 사..
정말 문득, 뜬금없이 든 생각인데 세상 모든 일이 계획대로 잘 흘러갈 것이라고 믿는 것이 너무 낭만적인 발상이라면, 세상 모든 일이 절대로 계획대로 잘 흘러갈 리가 없다고 믿는 것은 너무 패배주의적인 발상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럼 세상의 어떤 일들은 계획대로 잘 흘러가고, 어떤 일들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은 매우 현실적인 발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그건 조금 무책임한 발상이 아닐까 싶네요. 세상에는 계획대로 되지 않아서 잘 되는 일도 있고, 계획대로 되기는 했는데 계획자체가 잘못되어서 결과적으로 무척 잘못된 길로 빠져드는 일도 있는 법이잖아요. 잘 가고 있다가도 이런저런 이유로 비틀비틀 거릴 때가 있는 법이구요. 비행기가 날아가다가 비틀비틀 거리면 어떻게 될까요. 예상..
1 아침이었다. 출근을 하려고 집에서 나올 때면 온통 깜깜해서 내가 무척 부지런 한 것 처럼 느껴지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온통 환해서 내가 지금 주말에 느지막히 출근하는 것인지 아침에 부지런히 출근하는 것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던 그런 아침이었다. 견디기 힘들 것 같던 추위와 꼭 아파트 단지 입구에만 가면 미친듯이 불던 바람은 추억이 되었고, 지하철역 까지 뛰어야 될 것 같은데 차마 뛰지 못하게 만들었던 얼어붙은 바닥도 녹아서 흔적만 남긴, 그런 늦은 겨울의 출근길 이었다. 한 번도 버스를 타고 출근한 적은 없었기에, 지난 3년간 늘 그랬던 것 처럼 지하철 역에 카드를 찍고 들어갔다. 카드를 찍으면서 얼핏 이번 달에 쓴 교통비가 스쳐지나갔고, 그걸 보면서 벌써 이번 달도 중간이 넘었네..라는 생각이 ..
1. 지나치다 가을은 있는 듯 없는 듯 지나고 겨울이 막 시작되려고 할 때, 생각했던 모든 즐거운 일들을 집어 던지고는 대전행 기차에 탔다.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대전에 내려가라는 소리를 들은 것도, 마음의 준비를 하지도 못하고 내려간 것도. 많은 사람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것도. 상황이 안 좋다는 말은 너무 많이 들어서 설마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안 좋겠냐는 의심이 들 정도 였다. 혼자 사는 것도 처음이고 지방에서 사는 것도 처음인데 잘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일 하는거야 어떻게 어떻게 하면 될 것 같은데 먹고 자고 지내는 것들이 걱정이었다. 혼자서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이었다. 대전역에서 내려서 지하철을 탈 때까지도 걱정은 끝나지 않았다. 지하철에서 내려서 양손 양어깨에 짐을 한 가득 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