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에세이

Artificial Insomnia

June 2018. 9. 24. 04:48

오늘도 잠은 제시간에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마 내가 잠을 초대한 시간과 잠이 나에게 오기로 결심한 시간 사이에 작은 오해가 있었나 봅니다. 커뮤니케이션의 오류는 김치의 굴 만큼이나 잊을만하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편한 마음으로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다만 이 시간관념 없는 친구가 아침에는 가야 할 때를 모르고 계속 있을까 봐 그게 조금 걱정이었습니다.

불면증을 해결하기 위한 해결책이 몇 가지 있습니다. 특히나 약물이나 요란한 의식 없이 해볼 수 있는 해결책은 대부분 시도해본 적이 있었습니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머릿속에 가상의 울타리를 만들고 거기를 뛰어넘는 양을 세는 방법은 어떨까요? 예전에 1024마리까지 세어도 잠이 안 와서 포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찾아보니까 한국어로 세면 효과가 별로 없고 오히려 정신이 또렷해진다고 하더라고요. 영어로 세어보려고 했지만 네이티브가 아니어서 그런지 세는 속도가 심각하게 느려졌습니다. 그렇다면 전자 양을 이진수로 세어볼까 고민하다가 나는 안드로이드도 아닐뿐더러 잠들고자 하는 사람이 두뇌를 활성화하는 것은 좋은 판단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울타리를 해체시키고 양떼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ASMR을 들으면 효과가 있을까요? 예전에 1시간 가까이 들어서 겨우 잠든 적이 있었는데 얼마지나지 않아 이어폰에 귀가 눌리면서 으어어 하면서 깨어난 뒤로 다시 잠이 안왔던 기억이 있었습니다. 백색소음이 수면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얼마전에 백색소음을 발생시켜주는 - 뒤척여도 귀가 눌리지 않는 - 디지털 귀마개를 비싸게 주고 산 적이 있었는데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비행기 엔진 소리를 들으면서 잠이 잘 온다고 하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포기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명상 기법을 활용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몸을 가장 편한 자세로 두고 모든 부위에서 힘을 빼려고 노력하면 수면에 도움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시도해보자 순간 몸 이곳저곳이 간지러워지기 시작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명상을 할 때는 들숨과 날숨에 천천히 집중하라고 했던 기억도 있었는데, 숨 쉬는 것에 집중하는 순간 갑자기 횡격막이 수의근인지 불수의근인지 궁금해졌습니다. 내가 지금 숨 쉬는 타이밍을 조절하고 있으니 수의근이 맞는 것 같은데, 평소에는 심장이 뛰는 것과 비슷하게 호흡도 별로 신경 안 쓰잖아요? 그러면 불수의근이 아닐까요? 갑자기 너무 궁금해져서 명상의 시간을 취소해버리고 정보검색의 시간으로 전환했습니다.

살면서 다시는 써먹을 일이 없을 것 같은 지식에 횡격막이 수의근에 속한다는 사실을 추가하자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무의식중에 이루어지는 호흡은 어떤 원리로 이루어지는지에 대해서 다음에 알아봐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여전히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핸드폰을 내려놨습니다. 핸드폰이 잠기면서 현재 시각을 표시해주자 갑자기 오이냉국이라도 마신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이제 슬슬 바로 잠들지 않으면 내일 일정과 컨디션에 차질이 생길 시간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물론 방금 각성해버린 탓에 쉽게 잠들기는 틀렸지만요.

한 번도 효과를 본적은 없었지만 음악을 틀어볼까 고민을 했습니다. 지금 내가 말 한마디만 하면 바로 음악을 틀어줄 인공지능이 주변에 4개 이상 대기하고 있으니 충분히 시도해볼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클로바, 누구, 구글 어시스턴트, 시리 중 어떤 인공지능을 부를까 잠시 고민하다가 그래도 평소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시리에게 음악 추천을 부탁하고자 마음을 먹었습니다. 평소에 제가 듣는 음악에 대한 데이터를 충실하게 수집했다면 제 음악 취향을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으니까요.

몇 분 뒤, 저는 시리가 추천해준 이매진 드래곤스의 Zero를 듣고 완전 신나는 기분이 되어버렸습니다. 최소한 이번에는 시리가 취향을 제대로 저격했다는 사실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조금만 더 똑똑해서 새벽 두 시에 음악 재생을 요청한 의도를 파악하고, 차분한 음악을 틀어줬으면 더 좋았겠지만요. 이전보다 훨씬 또렷해진 정신으로 주먹왕 랄프2는 꼭 극장에서 봐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정중하게 음악을 꺼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시리야, 음악 좀 꺼주실래요?

그리고 다시 핸드폰을 집어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영화를 하나 틀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당장은 불빛과 소리가 수면을 방해하겠지만 그래도 설마 영화를 끝까지 볼 때까지 단 한 번도 잠이 오지 않겠어요? 영화를 보다가 중간에 살짝 졸린 타이밍에 그대로 굴복해버리면 무사히 잠이 들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인공지능의 추천이 아닌 자체적인 분류에 따라서 잔잔하고 덜 자극적인 영화를 찾아서 재생을 시작했습니다.

두 시간 뒤, 스포트라이트의 3회차 관람을 마친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직업적 소명이 무엇이며 내가 얼마나 진정성 있는 태도를 가지고 그 소명을 대하고 있는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오늘의 불면증은 진실에 대한 인간의 의지 만큼이나 매우 강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간은 이미 새벽 4시가 되었고 당장 잠들어도 좋은 컨디션으로 출근하기는 글러 버렸습니다. 이대로 한 시간 정도만 지나면 제가 결정의 시각이라고 이름 붙인 새벽 5시가 오게 됩니다. 어떻게든 잠들려고 시도해서 한 두시간이라도 자고 출근할지, 아니면 그냥 일어나서 그대로 첫차 타고 출근해버릴지 결정해야 하는 그 시각이요.

잠이 오지 않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이유를 도통 알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 이유가 없어서가 아니라 후보가 너무 많아서요. 일단 일하면서 커피를 엄청 마셨습니다. 그래도 마지막 잔을 마실 때는 약간 마음에 찔려서 두유 라떼를 마셨는데 그 정도 노력으로는 부족했나 봅니다. 그리고 오늘은 별다른 체력의 소모가 없었습니다. 몸이 힘들었으면 숙면을 취할 수 있었을텐데 보통은 마음만 힘들거든요. 그리고 어디선가 백업이라도 하는지 가끔 하드디스크 읽는 소리가 드르륵 들리면서 신경을 긁습니다. 다음에는 돈 많이 벌어서 꼭 하드디스크가 아닌 SSD로만 시스템을 구성해야겠다고 다짐하지만 당장 시끄러운 것을 어쩔 수는 없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신경쓰이는 푸른빛은 아마 USB 허브의 불빛인 것 같습니다. 항상 잠에 들지 못할 때 마다 저걸 바꾸든지 LED에 테이프를 붙이든지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항상 잠에 들지 못할 때만 그 사실을 기억해내곤 후회합니다. 그래서 그냥 눈을 감으면 어지러운 생각들이 머리를 활기차게 돌아다닙니다.

불면을 유발한 범인은 아마도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는 심정적으로는 머릿속에 생각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는 설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마음이 평화로울 때는 별로 잠이 안 와서 고민한 적이 없었거든요. 하지만 걱정과 고민과 후회가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면 도통 잘 수가 없습니다. 사실 별로 중요한 생각도 고민도 아니었는데 말이죠. 노란 파프리카와 빨간 파프리카 중 무엇을 먹을까 하는 정도로 무가치한 고민이 대부분 이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사소한 생각들이 서로 겹치면서 증폭되어서 심장을 뛰게 만들고 맑은 정신을 불러오죠.

하루 종일 화나는 일들과 상황들이 나를 괴롭히면 그날은 거의 반드시 쉽게 잠들지 못했습니다. 주로 과거라는 것이 없는 듯이 뻔뻔한 사람들과 미래라는 것이 없는 듯이 생각 없는 사람들이 저를 화나게 했었습니다. 신뢰를 담지 않은 관심과 신뢰로 포장된 무관심이 저를 데친 브로콜리 만큼이나 무미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들도 힘들었고요. 이런 사람들 때문에 마음속에 사랑과 평화가 아닌 증오와 투쟁심을 가득 담아서 퇴근하게 되면 그날 저녁엔 마음을 비우느라 고생할 수밖에 없었죠. 물론 가만히 누워서 눈을 감으면 마음이 쓰레기통 비우듯이 비워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더 짜증 나네?'식으로 미움이 물에 불린 미역처럼 불어날 때가 많았죠.

그리고 가끔은 불확실한 미래가 잠을 방해하기도 했습니다. 8시간 뒤, 8일 뒤, 8개월 뒤, 8년 뒤를 생각할 때마다 우울해지면서 복잡한 생각에 잠들지 못할 때가 많았죠. 아마도 당장 집중할 목표나 이루고자 하는 꿈이 불확실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모범적인 인생이라면 가슴 뛰게 해주는 순간을 찾기 위해서 뛰다가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안정을 찾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결국 원하던 미래를 만들어 나갔을 텐데, 어떤 미래를 원하는지 모른다면 어떤 방향으로 뛰어야 할지도 모르고 방황할 수 밖에 없으니까요. 확신없이 뛰어나가면 내가 어디쯤 왔는지도 몰라서 쉴 타이밍을 잡기도 어렵죠. 결국 어딘가에 걸려 넘어져서야 쓰러진 상태로 간신히 쉬게 됩니다. 아픈 것을 한참 견디면서요.

보통 미래의 불확실성은 우울했던 과거에 기인한 경우가 많습니다. 바꿔말하면 밝은 미래를 꿈꾸면서 편안하게 잠들고자 한다면 일단 일상이 즐거워져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즐거운 하루가 계속 쌓여야 인생이 선형적으로 행복한 미래를 향해 전진하니까요. 하지만 행복하고 우울한 하루가 반복되면서 인생이 진동하는 것을 느낄 때면 그 탈출구로 느닷없는 불연속 지점을 기대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로또 당첨 같은 거요. 하지만 디지털 세상이 아닌 실제 세상에서 미분 불가능한 지점을 기대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차라리 계속 흔들리는 게 낫죠. 우리 인생은 가끔 양수이거나 음수일 수는 있어도 허수는 아니잖아요?

어떻게 살아가야 날달걀처럼 껍질 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영혼을 완숙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어쩌면 비장한 각오나 원대한 목표 같은 것이 오히려 사람을 힘들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내 인생은 어마어마하게 위대해져야만 가치 있는 것이라 생각하는 순간 스스로의 무가치함에 질려서 정신이 나락으로 떨어질 때가 있거든요. 어떤 철학자는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스스로에 대한 과도한 애정을 거두고 살짝 무관심해질 필요가 있다고 했고요. 위대하고 아름다운 인생을 위해서 내일 당장 어떤 엄청난 일을 해내야 할까 고민하는 것은 숙면에 도움이 안 돼요. 결국 나를 괴롭히는 불면증은 바깥에서 온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만들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요?

내 인생에 대한 기대감을 살짝 낮추고, 눈을 감은 뒤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소한 일상들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항상 잠드는 것을 방해하는 악몽 같았던 기억 때문에 가려져 있었던 소소한 하루가요. 간단한 인사, 일상적인 대화, 평범한 취미생활, 재미있었던 동영상, 즐거웠던 음악. 어쩌면 저희는 그런 작은 일상들에 의지하여 인생을 만들어가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화나고 힘들고 아팠던 기억들로 잠을 설치면서 오히려 감사해야 하는 것들을 놓치고 있을지도 모르겠고요. 그래서 계속 눈을 감은 채로 즐거웠던 순간들을 밀푀유처럼 겹쳐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마음속에 평화롭고 행복한 무언가가 차올라 두근거릴 때가 있습니다. 잠들기 좋은 순간이지요.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율출-퇴-근제  (0) 2018.10.22
그림자와 그늘의 차이에 대해  (2) 2018.10.09
Semi-Automatic  (0) 2018.09.10
Little Big Adventure  (2) 2018.09.07
From Papercut to Sharp Edges  (0) 2018.08.26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