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초의 일입니다. 10일짜리 상병 정기 휴가를 나와서 3일 정도만에 만날 사람을 다 만나고 7일 정도의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던 저는 의미 없이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문득 소프트웨어 분야의 큰 별이 하나 졌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의 이름은 재프 래스킨(Jef Raskin)이었고, 인터페이스 디자인의 대부였으며, 그 유명한 1984 매킨토시를 개발한 사람이었지만 프로젝트 도중 스티브 잡스와 크게 싸우고 팀을 나간 덕분에 이 분야에 어지간히 관심이 있지 않은 저 같은 사람에게는 다소 생소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인터페이스 디자인은 잘 모르는 분야였지만 존경할만한 소프트웨어 거장이 - 내가 그 사람을 존경하기도 전에 -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저는 아무래도 이 사람이 누군지 조금 더 자세히 알아..
연구에 따라 추정치가 바뀌기는 하지만 현생 인류는 수십만 년 전에 지구에 등장하였다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에 비하여 농경의 역사는 1만 년 정도로 아주 짧은 편입니다. 농경을 시작하면서 인간들은 채집과 수렵을 위해서 적절한 거주지를 옮겨 다니던 생활을 청산하고 한 곳에 정주하기 시작했고, 여기에서 문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마도 수렵을 하던 시절의 인류는 야생에 나가서 동물들과 혈투를 벌이기도 했겠지만, 주로 강가나 바닷가에서 물고기들을 잡아먹으면서 살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일단 사냥이라는 것 자체가 노력과 운이 과도하게 들어가는 일이기에 ROI가 생각처럼 잘 나오는 활동이 아닌 편이고, 식량의 조리와 장기 저장이 쉽지 않던 시절에는 수급을 예측하기 어려운 사냥보다는 채집에 가까운 수렵 활동인 낚시가 ..
갑자기 언젠가 어릴 때의 주의력 결핍이 성인이 되면 불안장애로 이어진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주의가 산만한 아이가 분별력과 집중력을 가진 어른이 될 것을 강요받기 시작하면, 그 산만함이 내재화되어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불안감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이라면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덜 불안해하는 편인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방금 전 읽기 시작한 책을 대충 옆에 던져놓고 TV에서 재생되는 유튜브 영상에서 그렇게 일상생활에 도움이 되지는 않는 지식을 습득하면서 동시에 노트북을 켜놓고 당장 필요하지 않은 일들을 하다가 막 옆에 있던 핸드폰을 들어 올리면서 한 생각이었다. 들어 올린 핸드폰의 화면이 자동으로 켜지지 않길래 핸드폰 화면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면서 나는 그냥 아직..
터미널에 비친 로그에 좌절해서 얼굴을 찌푸렸다. 이 몹쓸 캐시는 얌전히 데이터를 가지고 있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원래 캐시는 데이터를 유지할 의무가 없었지만, 몹쓸 개발자였던 나는 일관성 없이 사라지는 데이터들이 주는 시련에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문득 어느 주말, 회의실에 모여서 보고 자료를 리뷰할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기술적인 용어가 가득한 문서를 리뷰하다가 갑자기 상석에 앉아있던 임원 한 분이 '그런데 너네 캐시와 인메모리 데이터 그리드의 차이는 알고 쓴 거야?'라고 물어봤고, 속으로 아니 여기 앉아있는 사람들의 아키텍트 경력만 합쳐도 200년은 될 텐데 누가 그걸 몰라?라고 생각했지만, 고작 7년 차 막내 아키텍트였기에 차마 나서서 대답할 수 없었던 나는 토카막의 플라스마처럼 위태롭게 유지..
평온무사한 하루를 마치고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을 때였습니다. 쓰레기를 탈탈 털고, 손도 탈탈 턴 다음에 집에 들어가려다가 문득 오늘이 정월대보름이라는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오늘 정말 둥근달이 떴을까 궁금해져서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쳐다봤는데 주변 건물들에 막혀서 달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집 앞에서 달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그제야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전까지는 한 번도 달이 제대로 붙어있나 확인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살면서 달을 두 눈으로 확인한 적이 그리 많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살면서 달을 두 눈으로 본 적은 무수히 많았겠지만, '나는 지금 달을 봐야겠어'라는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확인한 적이요. 제 기억으로는 지금 다니는 회사의 입사시험을 봤던 날,..
우리들의 분리수거는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 분리수거칼을 이용해 페트병에서 라벨을 분리하다가 갑자기 든 생각이었다. 분리수거칼이라는 말도 생각해보면 좀 이상했다. 놀라운 사실이지만 세상에는 분리수거 전용 칼이라는 것이 있었고, 심지어 내 손에 들려있었다. 나는 이 복잡하게 생긴 분리수거칼이 어떤 인간공학적인 고민을 거쳐서 만들어진 것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저 커터칼보다 덜 날카롭다는 이유로 그 본연의 용도에 맞게 사용하고 있었다. 일단 덜 날카로우면 페트병이 찢어질 염려가 적다. 그리고 내 손이 찢길 염려도 적고. 분리수거 전용 칼은 정확히 말하면 플라스틱 - 비닐 분리 전용 칼이었다. 대부분의 분리수거 활동에서 플라스틱과 비닐의 분리는 매우 중요하다. 대부분의 경우에 '비닐 라벨이 붙은 플라스틱 용기'..
나는 개발왕이 될 거야 - 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놀랍고 부끄럽게도 중2 때가 아니라 직2 때였다. 사실 중2 때의 나는 이미 내가 개발왕이라고 생각했었다. 주변에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서. 그러니까 직2때 나는 개발왕이 될 거야라고 생각했다는 말은 주변에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인정한 겸손한 표현이었다. 사실 누구라도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다. 주 100시간이라는 웅대한 업무 시간 동안 앉아서 개발만 하다 보면. 수평선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일감 목록 앞에 마주한 나 자신을 생각하면, 인간이 왜 대자연과 코드 앞에서 겸손해져야 하는지 쉽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샌가 나에게도 '그 시기'가 왔다. 모든 개발 인생에 한 번은 꼭 온다는 '퇴근하다가 가벼운 교통사고가 ..
세 번째인가 다섯 번째쯤 다시 비명소리 같은 사이렌 소리가 새벽 공기를 찢어버릴 기세로 귓가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두 번째인가 네 번째쯤까지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던 집중력이 툭 하고 끊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가 물리학에 조예가 깊었다면 도플러 효과를 응용해서 저 사이렌이 어느 방향으로 어느 속도로 움직이는지 계산할 수 있었겠지만 솔직히 저는 저 사이렌 소리의 근원이 경찰차인지 앰뷸런스 인지도 잘 몰랐습니다. 그저 집 앞에 외상치료로는 서부 최고라는 병원이 있었으니 앰뷸런스 소리가 아닐까 추측했을 뿐. 그리고 왜 그 병원이 중증 외상치료 경험이 풍부한지에 대해서는 되도록 추측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사이렌 소리가 멀어지고 주위는 이내 적막해졌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울음소리 같은 빗소리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