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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발왕이 될 거야 - 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놀랍고 부끄럽게도 중2 때가 아니라 직2 때였다. 사실 중2 때의 나는 이미 내가 개발왕이라고 생각했었다. 주변에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서. 그러니까 직2때 나는 개발왕이 될 거야라고 생각했다는 말은 주변에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인정한 겸손한 표현이었다. 사실 누구라도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다. 주 100시간이라는 웅대한 업무 시간 동안 앉아서 개발만 하다 보면. 수평선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일감 목록 앞에 마주한 나 자신을 생각하면, 인간이 왜 대자연과 코드 앞에서 겸손해져야 하는지 쉽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샌가 나에게도 '그 시기'가 왔다. 모든 개발 인생에 한 번은 꼭 온다는 '퇴근하다가 가벼운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에 몇 주 누워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던 시기. 하지만 뭔가 어설프게 다치면 한 이틀이나 사흘 정도만 누워있다가 다시 출근할 것 같아서, 그러면 이틀이나 사흘이 밀린 일감 목록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서 횡단보도를 건널 때는 항상 좌우를 더블체크하면서 건너곤 했다.
그렇게 의식주를 제외한 모든 생체 활동을 개발에 몰빵한 지 20,000시간이 되었을 무렵, 그러니까 프로젝트 시작한 지 20주 정도 되었을 때 마침내 미쳐버려서 '나는 개발왕이 될 거야'라고 선언하고 동료를 모아서 항해를 시작했다는 식상하고 예측 가능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당시에 내가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은 그냥 깨끗하고 순수한 증오심에 기반한 것이었다. 당시에 일을 하다가 일련의 무례하고 몰상식한 무리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경험이 일천했던 나는 이 바닥에 그런 무리들은 시작마을 근처 슬라임처럼 흔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지금이 일생일대의 고비라고만 생각했다. 만약 경험이 조금만 더 많았다면 그런 사람들은 상대하지 말고 그냥 잘 피해 다니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을 알았을테지만, 스물아홉의 2년 차 개발자는 지나다니는 트럭은 잘 피해도 슬라임들을 피해 다니는 법은 알지 못했고 결국 인카운터를 당하고야 말았다.
그렇게 인생 첫 악당들에게 시달리며 모욕과 오욕으로 점철된 나날을 보내다가 유난히 상처를 많이 받고는 핫식스를 포션 삼아 연속으로 들이키던 어느 날 저녁에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나에게 절대적인 힘이 있었다면, 저 사람들이 앞으로 마시는 맥주가 모두 오이냉국 맛이 나는 형벌을 내려줬을 텐데. 하지만 나는 상대적으로도 힘이 없었고, 내가 저 사람들을 폭력, 정치, 권력, 돈, 말발, 협박, 설득으로 제압하는 것은 먼 미래에도 요원한 일이다. 내가 저 사람들을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다면 그것은 기술뿐이다. 여기가 어디냐. 공업입국의 나라가 아니었는가. 내가 진짜 대체 불가능한 어마어마한 실력의 개발자라면 저 사람들이 저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텐데. 내가 오늘의 수모는 꼭 기억해뒀다가 언젠가 저 사람들이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제발 하루만이라도 같이 일해달라고 애원하게 만들어주리라. 상상만 해도 짜릿한 일이었다. 그래서 다짐했다. 그래, 나는 개발왕이 될 거야.
증오에 기반한 다짐의 큰 단점은 너무 쉽게 사그라든다는 점이었다. 특히나 프로젝트에서 발화한 증오는 프로젝트가 끝나면서 곧바로 진화된다. 살면서 프로젝트를 하는 동안에는 마치 조커처럼 사무실에 불을 지르는 101가지 방법에 대해 고민하던 친구들이 프로젝트가 끝나자마자 은퇴한 캡틴 아메리카라도 된 것처럼 그 시절을 아련한 추억 정도로 취급하는 것을 너무 많이 봐왔다. 프로젝트가 끝나고 몇 개정도 다른 프로젝트를 경험하다 보면 '내가 그때 왜 그렇게 화를 냈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게 마치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몇 반이었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만큼이나 희미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라서 그토록 고통을 받다가도 막상 프로젝트가 끝나자 개발왕이 아니라 개발나졸로 사는 것도 그렇게 나쁜 인생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몇 년쯤 지나자 나는 드디어 이 바닥이 어떻게 굴러가는지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었다. 개발자의 인생은 남극 탐험의 펭귄과 같은 것이라서 멈추지 못하고 계속 달려야만 하며, 끊임없이 내 앞에 놓이는 크레바스와 같은 위기를 잘 뛰어넘으면서 가끔씩 만나는 바다표범과 같은 악당들과의 충돌을 피해 다녀야 하는 인생인 것을. 그리고 이 사실을 안다고 해도 잘 나간다 싶으면 느닷없이 고개를 들어 올리는 바다표범을 뛰어넘는 것이 어려웠음을.
증오심은 사그라드는 것도 빠르지만 리필도 빠르다. 조금만 평화로워지려고 하면 버추어캅의 시민들처럼 튀어나오는 빌런들이 나를 심심하지 않게 해주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인증서를 갱신하듯이 매년 새로운 다짐으로 각오를 갱신하며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를 채워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을 회귀적으로 반복하자 나에게 남은 것은 높은 개발 실력이 아니라 어중간한 레벨로 점철된 기술 커리어와 다양한 형태로 잔존하는 후회의 편린들이었다. 그래서 가끔 후회를 조각모음하다보면 후회에 대한 후회, 그러니까 재귀후회가 생겨나곤 했다. 왜 그때는 더 침착하지 못했을까? 왜 그때는 더 화내지 않았을까? 왜 그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까? 왜 그때는 더 열심히 하지 않았을까?
그러다가 몇 년 전에 다시 한번 각오를 다질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다. 인그레스와 이그레스도 똑바로 구분 못 해서 내가 많이 도와드려야 겠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갑자기 나에게 맥락에도 맞지 않는 어려운 용어들로 점철된 스노비즘의 표본과도 같던 메일을 보내면서 문서 똑바로 만들라고 지적질을 했던 것이었다. 소포모어 시즌의 나였다면 그 공격에 정신을 못 차리고 나는 왜 이렇게 멍청해서 이런 문서 하나 똑바로 못 만들었을까 상처 받았겠지만, 이미 연차가 두 자릿수에 돌입했던 나는 그 메일이 다 본인의 부족함을 가리기 위한 연막탄, 혹은 만만한 사람을 견제하고 공격해서 자신의 입지를 탄탄히 다지기 위한 일종의 정치질처럼 보였다. 안 그랬다면 어찌 그런 '선배의 따뜻한 조언'을 전체 메일로 돌렸을까.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제 나는 이럴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어이구, 확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경험이 부족하여 잘 몰랐습니다. 말씀하신 내용들을 반영하여 수정했습니다. 다음에도 많은 지도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마치 루프백 어드레스를 해킹하듯이 자기 복제로 분량을 늘린 수정본 문서 첨부하여 메일 발송. 그러면 보통 내용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듯한 답장이 온다.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생각이 올바르게 잘 박힌 청년인 거 같으니 다음에도 기회가 있으면 같이 일합시다. 나는 그런 답장에 대체로 만족했는데, 충분히 만만하고 별로 위협이 되지 않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남긴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모쪼록 저렙일 때야 슬라임을 때려잡기 위해 같은 필드를 몇 번씩 돌아다니는 법이지만, 고렙 플레이어는 슬라임따위에 시간 낭비를 하지 않으니까.
이쯤 되면 나는 결국 개발왕이 아니라 처세왕이 된 것이 아닐까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싸워서 이기는 법을 알아내기보다는 싸우지 않는 법을 터득하는 인생이 옳은 방향인 것인가. 힘이 아니라 민첩에 몰빵 하면 나중에 최종 보스를 만났을 때 잘 싸울 수 있을까. 나는 노련함으로 포장된 비겁함 뒤에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우리는 어릴 때부터 너무 많은 것을 미워하고 싫어하라고 배우며 살았다. 내가 어릴 때는 공산당을 혐오하라고 배웠고, 좀 크니까 근면하지 않은 자를 혐오하라고, 좀 더 크니까 다수와 같은 생각을 가지지 않는 자들을 혐오하라고, 지금은 혐오하는 자들을 혐오하라는 말을 들으면서 살고있다. 그래야 그들을 반면교사 삼아서 올바른 인생을 살 수 있다고. 하지만 나는 미움과 증오에 기반하여 무언가를 잘하고자 하는 마음은 애프터 버너처럼 폭발력은 강할지언정 지속력이 부족한 활동이라, 그것이 나에게 서점에서 책을 잔뜩 사고, 인강을 결제하게 만들어주기는 해도 평생 지속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마도 다양한 종류의 악당들이 그냥 영역다툼을 하는 고양이처럼 귀여워 보이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던 것 같다.
하지만 지나치게 태평하고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는 것도 위험할 수 있다. 나는 이제 '너는 이 회사니까 인정받는 거지 다른 곳에선 아무것도 아니니 허튼 생각하지 말아라'라는 소리를 들을 때도 차분히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소리를 듣고도 내가 기필코 개발왕이 되어서 저 말이 틀렸다는 것을 눈앞에서 증명해 보이겠다 라는 투쟁심이 생기지 않는 게 맞는 것인가라고 고민하기도 했다. 버트런드 러셀은 인간의 마음이란 소시지를 만드는 기계와 같아서, 외부로부터 지속적으로 원료가 공급되지 않고 자아성찰만 반복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그랬는데, 나도 뭔가 멈춰버린 소시지 기계가 되어버린게 아닐까 싶어서.
하지만 몇 년정도 지나니까 조금 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잘하고자 하는 마음은 꼭 미움에 기반하지 않아도 여러 가지 이유로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 폐를 끼치기 싫다는 마음, 성장을 증명해내고 싶은 마음, 어려운 것들을 풀어내고 싶다는 마음 같은 것들로 부터. 그리고 무엇보다도 개발을 잘하면 그게 그냥 진짜 재미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일은 어쨌든 일이고 세상 모든 개발이 다 재미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가끔 진짜 어려워 보여서 내가 절대 못 만들 거 같았던 것들을 다 만들고 나서 '와, 나 오늘 좀 잘한 거 같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퇴근할 때면 왕이라도 된 기분이 들었다. 아마 그 많은 악당, 슬라임, 바다표범, 고양이들은 이 기분을 모를 테니 이 정도면 결과적으로 내가 이긴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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