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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분리수거는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 분리수거칼을 이용해 페트병에서 라벨을 분리하다가 갑자기 든 생각이었다. 분리수거칼이라는 말도 생각해보면 좀 이상했다. 놀라운 사실이지만 세상에는 분리수거 전용 칼이라는 것이 있었고, 심지어 내 손에 들려있었다. 나는 이 복잡하게 생긴 분리수거칼이 어떤 인간공학적인 고민을 거쳐서 만들어진 것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저 커터칼보다 덜 날카롭다는 이유로 그 본연의 용도에 맞게 사용하고 있었다. 일단 덜 날카로우면 페트병이 찢어질 염려가 적다. 그리고 내 손이 찢길 염려도 적고.

 

고민의 대상이 되었던 페트병은 이미 버렸기에 근처에 있는 삼다수 병을 찍어봤습니다. 사실 삼다수 병은 분리수거칼이 없어도 쉽게 라벨 제거가 가능합니다.

분리수거 전용 칼은 정확히 말하면 플라스틱 - 비닐 분리 전용 칼이었다. 대부분의 분리수거 활동에서 플라스틱과 비닐의 분리는 매우 중요하다. 대부분의 경우에 '비닐 라벨이 붙은 플라스틱 용기'는 그냥 '플라스틱'으로 인식하기 쉽다. 그래서 플라스틱이 들어가야 할 분리수거함에 피기백(Piggyback) 하여 비닐이 같이 들어가는 오류가 자주 발생한다. 또한 일부 식품 포장은 플라스틱과 비닐의 강한 접착을 통해 식품이 바깥으로 나오거나 균류가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는데, 이러한 비닐은 플라스틱과 분리하기 어렵기 때문에 역시나 일부 잔존 비닐이 플라스틱과 함께 분리수거될 위험성이 있다. 그러니까 플라스틱과 비닐을 분리해주는 도구는 지속 가능한 호모 사피엔스 생활을 위해 매우 바람직한 발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고 느낀 것은 갑자기 '그런데 왜 플라스틱이랑 비닐을 분리해야하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비닐이라고 부르는 그것은 사실 플라스틱이다. 그러니까 내가 들고 열심히 분리하고 있는 페트병은 폴리에틸렌 테레프탈레이트이고 라벨은 폴리프로필렌인데 이건 의심의 여지 없이 둘 다 플라스틱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플라스틱 분리수거함에 폴리프로필렌을 넣지 않기 위해서 분리하는 행동은 가치가 있는 행동일까? 폴리프로필렌을 일반화하면 플라스틱이 되므로 폴리모피즘의 원리를 생각하면 플라스틱을 넣는 통에 폴리프로필렌을 넣어도 문법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면 비닐이라는 말도 좀 이상하다. 영어권 국가에서 '비닐'이라는 말은 LP판을 의미하니 우리가 말하는 비닐봉지를 달라고 할 때는 '플라스틱 백'이라는 단어를 쓰라고 배웠다. 물론 한국인들의 인식에 '플라스틱 백'이라고 말하면 무슨 레고로 만든 가방 같은 게 먼저 떠오르는 게 인지상정이지만 이는 출국 전 치밀한 이미지 트레이닝을 통해 극복이 가능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상점에서 플라스틱 백이 아닌 페이퍼 백을 쓴다는 사실을 알면 인생이 무상하다는 것을 느낄 수도 있다) 생각해보면 비닐봉지라는 말도 이상하다. 봉지(封紙)의 지는 종이를 뜻하므로, 봉지는 종이봉투를 의미하고 비닐봉지는 비닐종이봉투라는 말이 된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 종이 - 플라스틱 화합물을 이용해 만든 봉투를 본 적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봉지라는 말보다는 봉투라는 용어를 쓰는 게 화학적으로 정확한 표현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국어사전에서 봉투는 편지나 서류를 넣기 위해 종이로 만든 주머니를 칭하는 말이라고 정의하고 있었다. 그래, 편지봉투, 서류봉투. 그런데 봉투는 종이로 만든 무언가로 정의된다니. 그럼 우리가 '편의점에서 양손에 들기 버거울 정도의 물건을 샀는데 미처 에코백을 가져오지 못했을 때 종업원에게 20원의 대가를 치르고 수령하는 폴리비닐 클로라이드 재질의 다회 사용 가능하지만 보통은 일회용으로 써서 많은 환경문제를 야기하는 주머니'는 뭐라고 불러야 할까? 혹시나 해서 봉지의 정의를 사전에서 찾아봤더니 종이나 비닐 따위로 만든 물건을 넣을 수 있는 주머니라고 정의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봉투라는 말보다는 봉지라는 말을 쓰는 게 언어학적으로는 정확한 표현이 될 것 같았다.

이건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 이학과 문학의 대립이야 그 유명한 소칼사건을 들지 않더라도 어지간한 커뮤니티에서는 쉽게 구경할 수 있는 일이지만, 정의(Definition)가 충돌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단어의 정의와 정리 국문학계가 담당할 일이고, 우리는 되도록 그것을 따라야 하지만 봉지라는 단어에 비닐이 속한다는 사실은 마치 고래상어가 고래의 일종이라는 말처럼 들렸다. 그렇지 않아도 요새 중립적인 단어를 쓰라는 운동이 한창이던데, 왜 여기에는 화학적으로 중립적인 단어를 대체 단어로 선택하고 사용하려는 노력이 없었을까?

복잡해진 마음으로 사전, 위키, 유튜브, 환경부 홈페이지 등을 뒤져보았지만 혼란스러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특히나 마음을 어지럽혔던 것은 스티로폼 이었다. 분리수거할 때 언제나 스티로폼은 많은 고민을 가져다준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스티로폼은 생각보다 자주 배출되는 쓰레기인데, 영등포에서 분리수거를 할 때도, 시애틀에서 분리수거를 할 때도, 송파구에서 분리수거를 할 때도 스티로폼을 위한 공간이 따로 마련된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누군가가 커다란 스티로폼 박스를 어딘가에 잘 내려놓으면 그곳이 스티로폼 분리수거 장소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종이, 유리, 캔, 플라스틱, 비닐의 공고한 카르텔에 스티로폼이 낄 자리는 없어 보였다. 상대적으로 배출양이 적어서였을까? 하지만 내 경험상 스티로폼은 대부분 부피가 큰 경우가 많았다. 절대 그렇게 무시당할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사실 스티로폼도 플라스틱의 일종이라는 생각을 하면 매우 심란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환경부의 가이드에서는 페트병에서 라벨을 제거한 뒤 라벨은 종량제 봉투에 배출하라고 가이드하고 있었다.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 페트병의 라벨에는 분리수거 마크도 있고 '비닐'로 분류하라는 말도 있고, 재질이 폴리프로필렌이라는 것도 분명히 명시하고 있는데? 이것도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제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도 잘 모르겠다. 분리수거 제도는 사실 우리 사회의 부족한 합의가 만들어낸 일종의 글리치였을까?

나는 지금까지 분리수거 마크가 없는 편의점 비닐봉투를 비닐류로 분리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확실한 근거 없이 내 마음대로 결론을 내린 것에 대해서 많은 죄책감을 느끼면서 살았다. 하지만 분리수거에 대해서 열심히 알아본 결과 내가 내린 결론은, 세상에 100% 완벽한 분리수거는 있을 수 없으며 생각보다 많은 제도와 가이드, 해석들이 진정한 분리수거는 수거한 뒤에 이루어진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저 내가 집이나 회사에서 하는 분리수거는 '그럭저럭 최선을 다하면 고마운' 정도의 기대치만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그렇게 낮은 기대치를 상정하여 다시 생각해보면, 플라스틱과 비닐의 분류에 대해서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어도 됐다. 어차피 플라스틱이나 비닐이나 모두 고밀도 폴리에틸렌, 저밀도 폴리에틸렌, 폴리프로필렌, 폴리스티렌, 폴리비닐 클로라이드, 폴리에틸렌 테레프탈레이트, 기타라는 같은 분류를 가지고 있고 결국 플라스틱이냐 비닐이냐는 플라스틱을 덩어리로 만들었냐 얇은 필름 형태로 만들었냐의 구분이지 그 합성방식의 구분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필름류'라는 말을 쓰면 사람들은 진짜 필름 카메라에 들어가는 그런 필름을 연상할 수 있으니 '비닐류'라는 적당한 표현을 썼고, 필름 형태가 아닌 모든 플라스틱은 그냥 플라스틱이라고 구분한 것이고. 우리의 분리수거에 기대한 것이 딱 그 정도 수준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많은 관계자들은 사람들이 폴리 어쩌고에 대해서 고민하기보다는 그저 일반 쓰레기, 음식물 쓰레기, 재활용 쓰레기 구분만 잘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을 것이고. 그러니까 왼손에는 페트병, 오른손에는 분리수거 전용 칼을 들고 비닐과 플라스틱의 상속 관계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은 그다지 생산적인 시간이 아니었다.

차라리 내가 왜 분리수거를 하고 있는가에 고민하는 것이 훨씬 생산적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분리수거는 무질서를 질서로 바꿔주는 행동이다. 지역적으로는 엔트로피를 감소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전체적으로는 엔트로피의 증가 속도를 늦춰주는 효과가 있다. 역으로 생각하면 분리수거를 하는 이유는 질서가 무질서로 바뀌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엔트로피가 증가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물리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시간이 흐르는 이유는 엔트로피가 증가하기 때문이므로, 우리는 시간이 흐르기 때문에 분리수거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마도 나이가 들수록 분리수거에 열심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시간의 흐름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서가 아닐까.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느니 시간이 흐른다느니 하는 말은 너무 삭막하게 들리기에 조금 더 인문학적으로 표현하자면, 분리수거는 일상의 끝이다. 우리는 일상생활 동안 많은 상품들을 나에게 유용한 것과 유용하지 않은 것으로 분리하면서 사는데, 이 유용하지 않은 것들을 내 일상과 분리하는 작업이 분리수거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수면이 일상의 마무리라고 생각할 수 있을 수도 있지만, 이는 식사의 마무리가 뜸 들이기라는 말과 비슷하게 들린다. 새로운 일상을 위해 에너지를 충전하는 활동은 시작이 되어야지 끝이 되기가 어렵다. 반면에 분리수거는 지나간 일상의 잔존물들을 배출해내어 다음 일상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점에서 마무리의 자리에 등판하기에 손색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경험적으로 알고 있지만, 무언가를 마무리할 때 새로운 의문을 제시하는 것은 별로 좋은 흐름이 아니다. 그 의문의 답을 찾기 전에는 도저히 하고 있는 일을 마무리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나마 플라스틱과 비닐이 다른 것인가?라는 의문은 일상의 마무리를 20분 정도만 지연시켰지만, 만약 '그런데 리만 가설은 참인가?'라는 의문이라도 들었으면 어쩌려고 했을까. 그런 고민은 일상을 시작할 때, 그러니까 잠들기 전에 하는 게 적절하다. 그래서 과연 폴리 락틱 에시드로 만든 음식물 쓰레기봉투는 정말 음식물 쓰레기와 같이 버려도 괜찮은 것일까에 대한 의문은 되도록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모든 정리가 끝난 뒤에야 누워서 PLA 봉투에 대한 환경계와 업계의 치열한 대립에 대해서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우리들의 음식물 쓰레기 처리는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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