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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나에게 안경테를 고르는 일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어울리는 테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뭐, 대충 고르면 되는 거지. 하지만 안경렌즈를 고르는 것은 항상 어려운 일이었다. 구면? 비구면? 인덱스는? 코팅은? 초점거리는?

안경테를 고르는 것이 보통은 디자인을 위시한 정성적인 가치들이 크게 작용하는 일이라면, 안경렌즈를 고르는 것은 정량적인 가치가 크게 작용하는 일이었다. 인덱스가 높을수록 렌즈는 얇아진다. 구면 렌즈보다는 단면 비구면 렌즈가 더 선명하고, 양면 비구면 렌즈는 최고다. 자외선 차단 코팅은 거의 모든 렌즈에 기본으로 들어가 있는 것이니 신경쓸 것이 없다.

언제나 논리적이고 개연성 있는 흐름을 좋아하던 나에게 정량적인 선택은 쉬운 것이어야 했다. 하지만 안경렌즈를 고르는 일에는 지나치게 정량적인 가치가 하나 더 고려되어야 했으니, 바로 가격이었다. 보통 '압축'이라고 부르는 렌즈의 굴절률은 높을수록 렌즈가 가벼워지고 얇아지고 눈이 덜 작아 보인다는 장점이 있지만, 굴절률이 한 단계 올라갈 때마다 가격이 2배씩 뛰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가격이라는 가치는 항상 안경렌즈 고르는 일을 어렵게 만들었다.

고도근시에 중등난시였던 나는 항상 두꺼운 렌즈를 써야 했기에, 굴절률을 높여야만 그나마 쓸만한 안경을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돈이 별로 없던 학생 시절에는 기껏해야 인덱스 1.60 정도의 렌즈를 사는 게 고작이었고, 그 두꺼운 렌즈를 가리기 위해서 두꺼운 테를 쓸 수밖에 없었다. 안경이 무거워지는 것은 필연적이었고 그 무거운 안경을 매일매일 쓰고 다니는 것은 고역이었다.

그러한 고난의 나날들을 지내면서 가벼운 안경에 대한 열망은 하루가 다르게 커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공모전 상품으로 받은 카메라를 쓰지도 않고 바로 팔아버린 뒤 그 돈을 들고 학생회관 지하에 있는 안경원으로 달려갔다. 테는 베타티타늄이었으면 좋겠고요. 네. 아무거나 가벼운 거로요. 렌즈요? 최소 두 번 압축이요? 인덱스 1.60 말씀하시는 거죠? 아니요. 1.67 렌즈로 해주세요. 네네. 단면 비구면으로.

근시와 난시의 수치가 일반인들의 범주를 벗어나게 되면 안경원에서 해당 렌즈의 재고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작아진다. 그래서 보통은 렌즈를 주문하고 오기까지 며칠을 기다려야 안경을 맞출 수 있다. 그래서 당시 기준으로 큰돈을 쓰고도 물건을 바로 받지 못해서 작게 상심하기는 했지만, 드디어 인덱스 1.67의 렌즈를 써본다는 설렘이 너무 커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정말 안경을 안 쓴 것처럼 가벼울까.

며칠 뒤 안경을 받아서 써봤을 때, 나는 내가 성공해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세상이 HD에서 FHD로 업그레이드된 기분이 들었다. 이런 기분은 어렸을 때 컴퓨터에 부두2 카드를 끼운 이후로 처음 느끼는 기분이었다. 아, 사람은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구나. 그래서 그 돈을 적절한 곳에 써야 행복해질 수 있구나.

그리고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몇 번 안경을 바꿨지만 정작 인덱스 1.67 렌즈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인덱스 1.67 렌즈보다 좋은 렌즈는 인덱스 1.74의 렌즈였고 이 정도면 일반적인 플라스틱 렌즈에서는 최상위 제품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인덱스 1.74 렌즈를 쓰기에는 크나큰 걸림돌이 하나 있었다. 1.74 렌즈는 학생이 아닌 직장인 기준으로도 너무 비쌌다.

어지간한 시력도 인덱스 1.67 렌즈면 꽤 얇은 두께와 가벼운 무게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인덱스 1.74 렌즈는 어느 정도 하이엔드 시장을 노린 제품들만 있었고, 그래서인지 대부분 수입 렌즈가 많았다. 국산 렌즈에서 수입 렌즈로 넘어갈 때도 가격이 2배쯤 뛰고, 인덱스 1.67에서 1.74로 올라갈 때도 가격이 2배쯤 뛰고, 그 정도 렌즈를 쓰면서 이런 거 저런 거를 안 붙일 수도 없으니 거기서도 가격이 뛰었다. 세상에 그 돈이면 맥북을 하나 더 살 수 있는데!

그리고 인생 7번째인가 8번째 맥북을 샀을 때쯤 그런 생각을 했다. 이제 1.74 렌즈를 사도 괜찮지 않을까. 설령 그것이 장대한 돈 낭비가 될지언정 인생이 크게 망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고, 나름 얻는 교훈 비슷한 것들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안경원에서 상담을 받으면서도 계속 고민했다. 이것이 옳은 선택일까. 이 돈이면 13인치 노트북을 하나 사서 12인치부터 15인치까지 노트북 라인업을 1인치 단위로 빈틈없이 채울 수도 있겠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보니 이 돈을 아껴서 노트북을 산다고 해도 그게 그렇게 옳은 선택일 거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냥 미친척 결제를 하고, 몇 주를 기다리고, 인생 첫 인덱스 1.74의 안경을 받았다.

티타늄으로 만든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안경테 - 렌즈에 비하면 싸기는 했지만 이것도 만만치 않은 가격이었다 - 에 초고굴절 렌즈를 조합한 안경은 다시 한번 인생에서는 돈이 최고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그래, 이것은 옳은 결정이야. 다음부터는 노트북을 1년에 하나씩만 사고 안경에 조금 더 투자하자. 그래, 좋은 교훈을 얻었다고 생각하며 성공한 인생을 가진 자의 만족한 걸음걸이로 안경원을 나가려고 할 때, 안경원에서 안경케이스와 안경닦이를 챙겨주었다. 그런데 안경닦이가 내가 아는 보통의 모양, 그러니까 사각형의 천 조각이 아니라 무슨 '인생의 위기가 찾아왔을 때 열어보거라'에 가까운 주머니 같은 모양이어서 조금 당황했다. 인생의 위기가 찾아온 듯한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추며 주머니를 조심스럽게 열자 익숙한 보통의 사각형 천 조각이 나와서 더 당황했다. 이 주머니는 안경닦이 케이스인가요? 아니, 왜 안경닦이에 케이스가 필요하죠? 안경 케이스 안에 안경닦이 케이스를 넣고 그 안에 안경닦이를 넣어서 가지고 다니라고요?

그리고 이어서 알게 된 사실들은 나를 납득시켰다. 보통 안경닦이는 가방이나 옷 주머니 같은 곳에 넣어 다니게 되는데 그러면 이런저런 먼지들이 안경닦이에 묻게 되고 그걸로 안경을 닦으면 미세한 먼지들을 안경렌즈에 마찰시키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므로 렌즈에 손상을 가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아니 나의 소중한 인덱스 1.74 렌즈에 그런 일을 저지를 수는 없지!라고 생각하며 안경닦이와 그 케이스를 소중하게 챙겨서 집에 왔다.

그리고 집에서 조금 더 검색해보았다. 안경렌즈 관리법. 안경렌즈 잘 닦는 법. 초고굴절 안경렌즈 효과. 안경렌즈 오래 쓰기. 기타 등등. 그리고 흥미로운 정보를 얻었다. 이런저런 그런저런 이유로 안경닦이는 일회용을 쓰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다. 일회용 안경닦이는 밀봉되어 있으며, 뜯으면 곧 날아가는 알코올 비슷한 뭔가가 묻어있는 물티슈 같은 물건이었는데, 밀봉되어 있으므로 먼지 같은 것이 묻어있을 수가 없었고 렌즈를 스크래치 없이 깨끗하게 닦을 수 있었다. 안경 한 번 닦을 때마다 백 원씩 써야 한다는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단점이 있었지만, 필요한 곳에는 돈을 쓰는 것이 인생에 도움이 된다는 교훈을 얻은 나에게 그런 단점은 단점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일회용 안경닦이를 1,000장, 그러니까 10만 원어치 주문하고는 혹시나 일회용 안경닦이가 없어서 미세한 먼지가 묻어있을지도 모르는 안경닦이 천쪼가리로 나의 인덱스 1.74 렌즈를 닦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집, 사무실, 가방1, 가방2, 가방3에 분산해서 한 뭉텅이씩 넣어두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서 일회용 안경닦이로 안경을 닦는 행동에 익숙해질 무렵, 그러니까 무심결에 극장에서 3D 안경을 가방에서 꺼낸 일회용 안경닦이로 닦다가 화들짝 놀랄 때쯤이었다. 자기 전에 누워서 스마트폰을 들고 의미 없는 글과 의미 없는 영상들을 보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스마트폰으로 의미 없는 짓을 하다가 스르르 잠이 드는 것은 현대인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모습이므로 무슨 문제가 있거나 잘못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스르르 잠이 들면서 손에 힘이 스르르 빠졌다는 것이다. 180g의 무게에 알루미늄 바디를 가진 스마트폰은 자유를 찾아서 스르르 손에서 떨어졌고, 아주 짧은 구간을 자유낙하하며 중력가속도로 가속한 그 스마트폰은 자신의 라운딩 처리 된 모서리로 안경을 짧고 강하게 강타하고 쓰러지면서 침대에 살포시 안착했다. 순간 퍽 하는 소리에 잠이 번쩍 깨면서 자리에서 확 하고 일어났다. 바로 불을 켜고 안경을 벗어서 렌즈를 유심히 살펴봤다. 제발 아무 일도 없어라 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하지만 간절한 기대와 달리 안경 렌즈의 가장자리에 미세한 실금이 생긴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여태까지 이 안경을 어떻게 관리했는데! 라는 생각과 함께 억장이 무너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차라리 얼굴에 떨어져서 상처가 났으면 자연 치유됐을 텐데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안경을 다시 쓰고 면밀히 상태를 확인해봤는데, 다행히도 실금이 시야를 가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 번 보인 흠집은 안경을 집어 들 때마다 보였고, 그때마다 마음에 금이 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어느 늦은 여름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부드러운 안경 천과 매끄러운 렌즈 사이에 아주 미세한 알맹이, 그러니까 뭔가 거슬리는 것들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안경 천과 렌즈의 만남은 거시적으로는 보기 좋은 결과를 보여줄 지 몰라도, 미시적으로는 그 거슬림이 아주 미세하고 보이지 않는 상처들을 내고 그것이 렌즈의 수명을 갉아먹는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 안경닦이를 일회용으로 바꾸고, 안경닦이와 렌즈의 관계를 단편적이고 완벽한 관계로 만들자 렌즈는 미세한 상처들이 별로 없는 깨끗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상처에 내성이 없었기에 한순간의 실수로 만들어진 실금은 그 깨끗한 상태를 회복 불가능한 무언가로 만들어 버렸다. 차라리 미세한 상처들을 그냥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더라면, 조금만 덜 예민했더라면, 스마트폰이 떨어지건 칼날로 긁히건 '어, 그래도 아직 잘 보이네. 안 깨진 게 어디야. 운 좋았다'라고 하면서 신경 안 쓰고 넘어갈 수 있었을 텐데.

벤치에 앉아서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가 갑자기 안경이 많이 지저분해졌다는 생각을 했다. 습관적으로 가방에서 일회용 안경닦이를 꺼내려다가 아차 하는 기분이 들었다. 어제 새로 사서 오늘 처음 들고 나온 가방이라 일회용 안경닦이를 미처 챙기지 못했다. 그래서 가방을 닫고 조금 더 생각을 하다가, 안경렌즈가 너무 지저분해져서 시야를 가릴 정도가 되었을 때쯤 생각을 마무리하고, 안경을 벗어서 옷자락에 대충 닦은 뒤, 일어나서 집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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