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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언제나 별 고민이 없었다. 안녕하세요. 언제나 이걸로 시작했으니까. 그다음도 별로 어렵지 않았다. 어느 팀의 누구입니다. 인사말 이후에는 친하면 누구입니다. 안 친하면 어느 팀의 누구입니다. 이것도 그냥 공식에 가까워서 고민 없이 칠 수 있는 말이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지난번에 도움 주신 덕분에 는 너무 낮은 자세로 굽히고 들어가는 느낌이 났다. 지난번에 요청드린 것에 이어서 는 너무 사무적이었다. 이번에 메일을 드리게 된 것은 은 무난했지만 지난 메일과 이번 메일 사이에 적지 않은 기간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업무의 연속성을 상기시키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시작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업무 메일이라는 것은 편지라는 것에 강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업무에 방점이 찍혀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형식이나 문구에 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고, 예의를 차리느라 용건이 흐릿해지는 것은 오히려 경계해야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회사 생활에서 주고받는 메일은 대부분 안녕하세요. 요청하신 자료 보내드립니다. 라든지 안녕하세요. 지금 서버에 장애가 발생했는데요. 로그 첨부해드립니다. 라거나 안녕하세요. 금요일 저녁에 작업이 있을 예정이므로 퇴근 전에 소스코드 커밋하고 퇴근해주세요. 와 같이 간결하게 할 말만 하는 것이 좋은 메일이 된다. 


하지만 가끔 간결해지고 싶어도 간결해질 수 없는 메일이 있다. 안녕하세요. 말씀하신 기능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구현 가능성을 검토해봤는데 지금의 일정과 리소스로는 구현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그런 기능은 이 플랫폼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기능이라 말씀하신 요구사항은 OS를 새로 만들라는 말과 같은 말이니까요 말씀하신 기능은 이런저런 API를 사용하여서 이렇게 저렇게 구현해야 되는데 조사해본 결과 그런 API는 모 OS에는 있지만 이 OS에서는 아직 지원하지 않는 기능이며 지원하는 기능의 리스트는 아래에 첨부하였습니다. 여기서 끝내면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실 테니 해당 기능의 지원에 대해서 해당 플랫폼의 마일스톤을 확인해봤는데, 아직 관련된 API의 개발 일정은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물어보실 것 같아서 부연하자면 다른 방식으로 개발하려면 이런 API와 이런 오픈소스 컴포넌트를 조합해서 동일하지는 않아도 이런 방식으로 구현하는 방법이 있기는 하지만 이 경우 00 MM 정도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어 현재 일정으로는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의례적으로 드리는 말이지만 추후 해당 API가 업데이트되는지 지속적으로 확인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딱히 잘못한 것은 없지만 죄송스럽다는 태도를 가져야 될 때, 메일은 장황해지고 길어진다. 전달해야 되는 메시지, 그러니까 '당신의 요청은 들어드릴 수 없습니다.' 자체가 상대방이 듣고 싶었던 말이 아닐 테니 순수하게 듣기 싫은 말을 그나마 들어줄만한 말로 바꿔야 되기 때문이다. 세상의 이치가 그렇듯이 무언가를 바꾸고 변화시키는 일은 언제나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메일도 쓰기 어려운 메일은 아니었다. 회사 생활하면 자주 써야 되는 메일이었으니까. 정말 어려운 메일은 그 메일을 둘러싼 상황이 애매하고 미묘한 상황일 때 쓰는 메일이었다. 서로의 상황을 이해할 정도로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업무를 지시하고 수행하는 관계도 아니고, 그렇다고 서로 협업관계가 명확한 것도 아닌 상태. 각자가 각자의 업무에 치여서 바쁜 상황이라 다른 사람 신경 써줄 상황이 아닌 것을 아는 경우. 하지만 서로가 자신의 일을 또 그렇게 잘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서 뭘 해도 매끄럽게 해결이 되지 않고 고생할 것이 뻔할 때. 이미 그런 상황의 메일이 몇 번 오고 가서 서로 짜증이 적당히 쌓인 시점.


그럴 때도 일을 진행은 시켜야 되니까 어쩔 수 없이 메일을 보내야 될 때가 있다. 잘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상황은 조별과제를 할 때만큼이나 어색해졌다. 그래서 단어 하나하나가, 문장 하나하나가 가지는 함의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지난번에 요청드렸던 것에 이어서 가 적당한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무적인 표현이기는 했지만 앞으로 이어질 내용을 생각하면 시작하자마자 감사를 표현하거나 마치 처음 메일을 보내는 것처럼 보내는 것은 적절한 시작이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지난번에 도움을 주신 덕분에 환경 구성이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적극적으로 도와주신 덕분에 쉽게 끝낼 수 있었습니다. 류의 감사 표현은 생략했다. 실제로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았으니까. 예의상 할 수는 있는 말이었지만 상대방도 예의상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아는 상황에서 예의상 하는 말은 시종일관 감사를 표하는 메일이 아닌 이상은 별 의미 없는 법이다.


대신 저희가 추가한 기능들이 몇 개 더 있어서 추가적인 요청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했다. 한 문장을 쓰고 다시 읽어봤는데, 고민을 거듭해서 쓴 문장 치고는 지나치게 건조했다. 건조한 문장을 쓰기 위한 고민이었다고 생각하고 다음 문장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상대방이 싫어할 것을 알면서도 요청을 추가하는 배경을 설명해 드려야 하나. 별로 좋은 흐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희도 한 번에 요청드리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는 것을 알지만 윗분들이 하나라도 돌아가는 모습을 확인하고 싶어 하셔서 자꾸 요청드리는 겁니다. 라는 말을 다시 다듬는 것도 고생이었고, 그래 봐야 변명처럼 들릴 것 같았다.


추가한 기능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고 기능을 나열했다. 엑셀로 첨부해야 될 정도로 추가한 기능이 많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해야 될 일이 엑셀로 첨부되어서 날아왔을 때, 첨부파일을 눌러서 열리기 전까지 초록색 엑셀 로고를 바라보는 기분이 얼마나 별로인지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문장을 썼고, 하나의 목록을 추가했다. 별다른 감정 표현 없이 원하는 것을 전달했다. 여기까지는 메일을 쓰기 시작할 때 기대했던 흐름대로 갔다.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문의 드릴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일을 하다 보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문의사항은 아래에 정리했으니 확인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메모장을 띄웠다. 미리 정리해놓은 문의사항들이었다. 지난 며칠 동안 나를 지독히도 괴롭혔던 문제들이었다. 일을 하다가 저 쪽에서 뭔가 잘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정리해놓은 문의사항의 모음이었고, 별로 정리되지 않은 말들이 가득했다. 마우스로 글자들을 드래그해서 선택했다 풀었다 하면서 계속 고민했다. 몇 문장 되지는 않지만 메일을 쓰면서 지금까지 사무적이고 건조한 문체를 유지했던 것은 이 문의사항들을 그대로 보내기 위한 의도가 분명 있었다. 메일을 쓰기 위해서 작성 버튼을 누를 때부터 그런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일이 잘 안 풀릴 때마다 썼던 문의사항들에는 대놓고 쓰지는 않았더라도 '그쪽에서 뭔가 실수하신 것 같은데 아니라고 해보시죠' 식의 뉘앙스가 여기저기 있었고, 설령 실제로 저쪽에서 실수한 것이 맞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대놓고 혹은 은연중에 지적하는 것은 좋은 태도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그 언어들을 '저희가 잘못한 것일지도 모르겠는데 저희 능력으로는 문제를 파악하기 어려우니 죄송하지만 뭐가 문제인지 한 번만 확인해주실 수 있을까요'의 뉘앙스로 바꿔서 보내는 것이 의미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일단 그렇게 바꾸는 것도 많은 노력이 들어가는 일이었지만,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알고 보니 정말로 내가 무언가 잘못했던 것으로 나왔을 때 훨씬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다는 것. 그렇게 해서 잃는 것은 무엇일까? 알고 보니 저 쪽에서 뭔가 잘못했을 때 그것을 바로잡기 쉽지 않다는 것. 


결국엔 이 업무에 대해서 내가 확신이 없어서 자꾸 단어 하나마다 문장 하나마다 고민이 생기는 것이었다. 미묘한 상황이라는 것이 대체로 그렇다. 일을 하면서 무언가를 통제하고 이끌어간다는 느낌보다는 끌려다닌다는 느낌이 드는 상황. 원해서 하는 일보다는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 많아지고 잘 하는 일보다는 잘 모르는 일이 더 많은 상황. 그런 상황에서도 자신감을 잃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도 재능이라면 나에게는 그런 재능은 없는 것이 확실했다.


결국 문의사항들을 다시 다듬는데 또 긴긴 시간과 많은 고민을 투자했다. 책임소재를 가리자는 뉘앙스는 조금도 비치지 않도록, 태도는 애매하게 만들면서도 물어보는 것은 명확하게, 너무 공격적이지도 않고 방어적이지도 않은 단어들을 고르느라 엄청 고생했다.


메일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봤다. 요청하고 싶은 것도 다 요청했고, 물어보고 싶은 것도 다 물어봤고 그 과정에서 구차해지거나 장황해지지도 않았으니 할 만큼은 한 게 아닌가 싶었다. 마무리를 어떻게 할지만 조금 더 고민하면 될 것 같았다. 보통은 요청이나 문의 메일 보낼 때 급하게 요청드리는 것은 아니니 여유 있을 때 확인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라는 말로 마무리를 많이 했는데, 지금까지의 흐름에서는 갑자기 친절해지는 것 같아서 뭔가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글의 흐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친절하게 마무리하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다만 일종의 예의로 끼워 넣은 말이 가끔 '답장 안 주셔도 됩니다'로 해석될 때가 있어서 그게 마음에 조금 걸렸다.


제가 확인해드릴 게 있으면 연락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식의 마무리는 요청이나 문의가 아닌 메일을 보낼 때 자주 사용하던 문구였는데, 이것 좀 확인해주세요 라는 문의만 잔뜩 적어놓고 마지막에 이런 말을 쓰는 것도 조금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두 문장만 더 쓰면 이 상황을 끝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언제나 그렇듯이 그 마무리가 정말 어려웠다.


내가 왜 기계들이 이해하는 언어가 아닌 사람들이 이해하는 언어를 가지고 긴 시간을 고민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기분을 고려하는 것이 100만 번 실행 중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미묘한 동시성 오류를 찾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라서 그럴까. 아마도 어떤 상황을 해결하는 것에 더 익숙하냐의 차이가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더 이상 고민해봐야 좋은 마무리를 짓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는 그냥 감사합니다. 라고 마무리 짓고 그대로 메일을 발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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