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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Routine

June 2016. 8. 1. 01:55

위기는 언제나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찾아온다. 그러니까 예상하기 어려웠다는 말이다. 언제나처럼 출근을 위해 집을 나서면서 지갑이 있는지 확인하고, 사원증이 있는지 확인하고, 핸드폰에 배터리가 충분한지 확인하고, 이어폰을 꽂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마침 엘리베이터에 먼저 탄 사람이 있었기에 음악은 켜지 않은 상태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현관문을 나서고, 주위에 사람들이 충분히 멀어질 때가 되어서 음악 앱을 켜볼까 핸드폰을 꺼냈는데 마침 마을버스가 정류장에 진입하는 게 보였다. 버스를 놓치면 지각이거나 그런 건 없었지만 그래도 그 버스를 안 타면 10분은 기다려야 됐기에 일단 핸드폰을 그대로 손에 들고서 정류장을 향해서 가볍게 뛰었다. 늦지 않게 정류장에 도착해서 버스에 올라탔고, 이미 확인했던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서 요금을 내고 자리에 앉았다.


이제 더 이상의 변수는 없겠구나 생각하면서 핸드폰의 잠금을 해제하고, 음악 앱을 켜고, 재생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화면에 메시지가 떴다. "손상된 파일입니다." 잔잔했던 일상에 미미한 진동이 왔다. 다른 파일을 눌러봤다. 같은 메시지가 떴다. 스크롤을 마구 올리고 내려가며 10개 정도의 파일을 눌러봤는데 모두 같은 메시지였다. 조금 더 완벽하게 테스트해보고자 했다면 2,613번을 더 눌러서 '이 핸드폰에는 재생되는 음악이 없다'라는 결론을 확실하게 내릴 수 있었겠지만, 그 결론을 내는 과정 자체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문득 내가 지금 출근하고 있는 회사에 들어오겠다고 면접을 봤을 때 어떤 임원이 했던 질문이 생각났다. "여기 자기소개서에 보니까 창의적인 일이 하고 싶어서 이 회사에 지원했다고 그랬는데, 만약에 회사에서 단순 반복 작업을 업무로 주면 싫어하겠네요?"


손상되지 않은 음악이 있나 2,613번의 단순 반복적인 확인을 거듭하는 것 보다 창의적인 방법이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음악 앱을 완전히 종료하고 다시 켰다. 원래 소프트웨어라는 것이 그렇다. 결과에는 원인이 있고, 별다른 변화가 없다면 같은 결과가 나오는 것이 정상이다. 아마 음악 앱이 다시 켜지고 목록이 나오고, 그중 하나의 음악을 고르면 똑같이 손상된 파일이라는 메시지가 뜰 것이다. 99% 확실했다. 1% 정도의 확률로는 음악이 정상적으로 재생될지도 모르지만. 그런 경우라면 아마 음악 앱이 장기간 실행되면서 뭔가 메모리에서 꼬였던 케이스일테니까 별로 고민할 것이 없었다. 고민할 것은 다시 손상된 파일이라는 메시지가 뜨면 어쩔 거냐는 것이었다. 사실 별로 고민할 것도 없었다. 음악 파일들을 복구하는 방법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인데, 사원증을 놓고 온 것도 아니고 그건 불가능한 선택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손상된 것이 음악 파일들이 아니라 음악 앱이기를 바라면서 새로운 음악 앱을 받아서 실행해보는 것이었다. 일단은 손상된 파일이라는 메시지가 떠도 추가로 시도해볼 만한 해결책이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살짝 편해졌다. 뭐가 되었든 재생되는 음악이 있나 바보같이 음악들만 하나하나 누르고 있는 것보다야 훨씬 창의적인 시나리오였으니까.


짧은 고민과 찰나의 시나리오 구상과 함께 앱이 다시 실행되었다. 시나리오는 확실했다. (1) 앱이 켜진다. (2) 목록에서 아무 음악이나 누른다. (3) 음악이 재생되는가? (3-1) 재생되면 성공. 시나리오를 끝낸다. (3-2) 손상된 파일이라고 나오면 앱을 종료하고 스토어에서 아무 음악 앱이나 하나 받아서 다시 (1) 번부터 반복한다. 그리고 (1) 앱이 켜졌다. (2) 목록에서 아무 음악이나 눌러야 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다시 켜진 음악 앱은 목록에 아무 음악도 표시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목록에는 딱 하나의 음악만 있었다. 때마침 버스가 종점에 도착했고, 기계적으로 내려서 지하철 플랫폼으로 이동하면서 '버스에서의 잔잔한 해프닝'이 '아침 출근길의 위기'로 격상되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 아직도 55분가량 남은 출근길에서 내가 들을 수 있는 음악이 Over the horizon 한 곡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는 말이다.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가면서 한 번 목록에서 Over the horizon을 눌러봤다. 엄청 잘 나왔다. 굳이 끝까지 듣고 싶지는 않아서 바로 꺼버렸다. 다행히도 이 황당한 결과에서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모든 음악 파일을 외장 메모리에 넣어두었고, 모종의 이유로 그 외장 메모리가 손상되었거나 인식이 되지 않았고, 음악 앱이 음악 목록을 메모리에 캐시 해두고 있다가 실제로 음악을 재생하려고 하니까 파일을 못 찾고 손상된 파일이라는 메시지를 냈고, 음악 앱을 껐다가 다시 켜니까 앱은 자신이 찾을 수 있었던 유일한 음악, 하필이면 외장 메모리가 아닌 내장 메모리에 말 그대로 살 때부터 내장되어있던 - 그리고 가끔 재생하다가 나오면 신경질적으로 넘겨버렸던 - Over the horizon 딱 한 곡만 목록에 표시했던 것이었다.


지하철에 앉아서 생각해봤다. 메모리는 그렇게 쉽게 고장 나지 않는다. 아마 접촉 불량 같은 간단한 문제였을 것 같았다. RAM이든 ROM이든 잘 안 될 때 뺐다가 - 한 번 후 불어주고 - 다시 꽂으면 높은 확률로 잘 된다는 사실은 1MB짜리 램을 쓰던 시절에도, 4MB짜리 게임팩을 꽂던 시절에도, 그리고 128GB짜리 SD카드가 말썽일 때도 모두 통용되는 사실일 것이다. 문제는 내가 쓰는 핸드폰은 SD카드가 유심 트레이와 같이 있었다는 것이고, SD카드를 제거했다가 다시 설치하려면 유심 핀이 있어야 했다는 것이었다. 문득 우리나라에 아이폰이 처음 발매되었을 때, 설명서 사이에 유심 핀이 동봉되어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KT가 친절하게 '클립으로 유심핀 만드는 방법'을 같이 안내해줬던 사실이 떠올랐다. 유심 핀은 주위에 그렇게 흔한 물건은 아니지만, 클립이야 직장인들 가방에서는 쉽게 찾을 수 있는 물건이니까.


혹시나 내가 모르는 사이에 굴러다니는 클립이 가방에 있지 않을까 가방을 뒤져봤는데, 가방에는 우산 1개, 태블릿 2대, 보조배터리 3개, 펜 4개는 있어도 그 흔한 서류뭉치 하나, 그 흔한 클립 하나 없었다. 종이 쓸 일이 별로 없는 직업을 원망해야 할까 싶었다. 클립이 아니더라도 유심핀 용도로 쓸 수 있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열심히 뒤져봤는데 이어폰이 2개 정도 더 발견된 것 외에는 별 수확이 없었다. 예전에 퇴근길에 쓰던 이어폰이 고장 나는 위기 상황 뒤로 항상 예비 이어폰을 - 그리고 뭐라 말하기 어려운 불운의 연속으로 이어폰이 2개가 동시에 고장 난 뒤로 2개의 예비 이어폰을 - 가지고 다녔는데, 지금 상황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결국 외장 메모리를 살리는 일은 포기했다. 사실 애초에 메모리를 뺐다 낀다고 파일들이 살아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앱 새로 깔았다고 모든 것이 정상화 될 것이라는 기대만큼이나 별다른 근거가 없는 것이었다.


스트리밍 앱을 켜봤다. 가끔 신곡이 나왔을 때 들어보는 용도로만 쓰던 이 앱의 플레이리스트에는 유행 지난 노래만 가득했다. 그나마도 로그인이 풀렸는지 1분씩만 재생된다는 경고가 떴다. ID를 다시 찾아봐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냥 꺼버렸다. 들을 만한 노래들로 플레이 리스트를 다시 만들기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냥 잠이나 잤다가 도착할 때쯤 일어나면 좋았을 텐데 하필이면 전날 너무 많이 자서 컨디션이 엄청 좋았다. 영화 앱이나 TV 앱을 켜봐도 딱히 볼만한 영상이 없었다. VOD 목록을 몇 번 뒤져보다가 다시 꺼버렸다. 이번 출근길은 뭔가 꺼버리기만 하다가 끝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들을 것도 없고, 볼 것도 없고, 잠도 안 오는 출근길은 지루할 수밖에 없다. 할 수 있는 것은 생각이나 자신에 대한 성찰밖에 없었다. 그래서 열심히 후회했다. 나는 왜 전날 저녁에 음악이 제대로 나오는지 확인하지 않았을까. 나는 왜 유심핀 하나 들고 다니지 않았을까. 나는 왜 핸드폰을 하나만 들고 다녔을까. 나는 왜 한글 깨지는 게 보기 싫다고 구글 플레이 뮤직에 올려놨던 음악을 다 지워버렸을까. 출근길에 음악을 못 듣는 것 자체야 중대한 문제는 아니지만 그로 인해서 익숙했던 하루가 아닌 후회가득한 하루가 시작되는 것은 조금 문제였다. 루틴이 깨져버린 것이 문제였다.


그 여러 가지 후회 중 하나라도 내가 미리 '후회 없게' 준비를 철저히 했다면 내 일상엔 별다른 변화가 없었을 것 같았다. 어느 때처럼 이어폰에서는 음악이 나오고,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나와 비슷한 처지인 사람들을 스치면서 회사에 도착했을 것이다. 누구도 이상해하지 않을 잔잔한 하루의 시작이다. 지난 6년 동안 큰 변화 없이 유지해온 아침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똑같은 하루였다면 아무 후회가 없었을까? 항상 출근길에는 오늘도 별일 없기는 바라면서, 퇴근길에는 오늘도 별일 없었던 것을 후회했었던 것 같았다. 문득 돌이켜보면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나이만 먹었다는 사실에 소름 끼칠 때가 있었다.


면접장에서 "단순 반복 작업을 업무로 시키면 하기 싫어하겠네요?"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예. 그런 일을 하는 회사는 다니기 싫을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었던 것 같았다. 면접관들 표정을 살피는 재주는 없었는데 아주 약간의 침묵이 돌았던 것으로 봐서는 뭔가 분위기가 썩 좋았던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이 회사 소프트웨어 만드는 회사 아니었나? 소프트웨어 개발은 창의성이 가득한 업종인데 이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나? 무언가 잘못된 것 같았다. 그래서 아주 찰나의 어색한 침묵을 깨고 마음에 없던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그런 일을 해야 한다면 단순 반복적인 업무를 창의성 있게 진행하면 되지 않을까요? 효율을 높인다거나..." 면접에서 떨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봐서는 아마 높으신 분들은 네가 그렇게 할 수 있나 두고 보자 라는 생각들을 하신 게 아닐까 싶다.


옛날 사람들이 지구가 둥글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처럼, 충분히 큰 크기의 원은 그 선 위에서 보면 직선과 구분하기 어렵다. 자기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해도 크게 보면 빙빙 돌고 있는 경우가 충분히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세상 어딘가에는 그 지겨운 루틴을 깨뜨릴 계기가 있을 것 같았다. 꼭 그 계기가 바라던 모습이 아닌, 음악 파일이 다 깨져버리는 것처럼 정말 바라지 않던 모습으로 찾아올지라도 말이다. 그런 계기들을 마냥 두려워하면서 피하기만 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회는 언제나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찾아오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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