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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2002

June 2018. 5. 16. 02:00

어느날 새벽 2시 무렵이었습니다. 저는 시험공부를 한다고 캐시 라인의 복잡한 흐름을 눈으로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캐시 라인은 메인 메모리의 일정한 부분을 캐시 메모리로 이동시키는 단위를 말하는데, 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 프로토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캐시를 거쳐서 레지스터에 올라가는 데이터가 어디에서 어디로 흘러가지는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시험에 나온다고 했거든요.

교재를 아무리 봐도 표시된 화살표가 도대체 왜 여기서 저기로 이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집중력이 흐트러졌습니다. 정신이 산만해지자 아무렇게나 틀어놨던 음악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새벽 2시에 어울릴만한 감성을 가진 음악이었는데, 제 재생목록에 이런 조용한 음악이 있었다는 사실이 조금 생소하게 느껴졌습니다. 아마도 며칠 전에 보관함에 던져놓고 안 듣고 있었던 앨범의 수록곡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강의 교재를 잠시 내리고 음악 플레이어를 올려서 제목을 확인해 봤습니다.

역시나 제가 모르는 노래였고 처음 보는 제목의 노래 였습니다. 여기까지는 예상했던 흐름이었기에 별다른 감흥이 없었지만 바로 음악 플레이어를 다시 내리고 교재를 올리지 못하게 만든 것은 그 노래의 제목이었습니다. 그 노래의 제목은 2002였는데, 별다른 문맥과 배경지식 없이 추리하자면 아마도 2002년을 의미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나라에야 2002년에 대해 할 말이 많은 사람들이 하나둘이 아니겠지만 영국 출신의 91년생 가수가 2002년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궁금해서 잠시 인터넷 브라우저를 실행시켜서 가사를 찾아봤습니다. 가사 자체는 11살 시절의 아름다웠던 추억을 돌이켜보는 평범한 내용이었고 후렴구가 다소 독특했던 것 외에는 평범한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11살 시절에 특별한 추억이나 감정이 있기 어렵다고 생각했기에 크게 공감이 가는 가사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2002년을 돌이켜보니 뭔가 떠오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2002년, 그러니까 16년 전의 어느 봄날, 아마도 오전 9시나 10시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집 근처 정류정에서 19번 버스를 탔는데 앉을 자리는 커녕 곧 앉을 자리를 찾기도 어려울 정도로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이삼십 분은 가야 하는데 오늘 좀 고생하겠네 불평하면서 버스 출구 근처에 자리를 잡고 서서 창밖의 도로를 바라보았습니다. 나는 왜 독서실을 집 근처에 등록하지 않아서 이 고생을 하나 살짝 후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후회는 오래가지 않았는데, 애초에 독서실 갈 일을 만들지 않았으면 하는 훨씬 더 큰 후회가 밀려왔기 때문입니다.

후회를 후회로 덮었던 시점으로부터 다시 몇 달 전, 인생 첫 수능을 봤을 때 저는 이 수능이 내 인생의 마지막 수능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성적표를 받고 나서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수능을 유난히 잘 본것은 아니었지만 딱히 못 본것도 아니었거든요. 결정적으로 저는 대학교에서 내가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을까 없을가에 관심이 있었지 그 대학교가 어디였는지는 크게 신경쓰지 않고 있었습니다. 집에서 너무 멀지만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인생 첫 입시도 그런 맥락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재수를 해서 더 좋은 학교를 가겠다는 의지는 전혀 없었기에 담임 선생님이 진짜 이렇게 쓸꺼냐고 되물을 정도로 안정적으로 합격할 만한 학교에만 지원했었습니다. 어디를 가도 수학, 물리, 생물 이런 과목들을 1년 다시 공부하는 것보다야 훨씬 재미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런 낙천적인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학교에서 탈락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생각보다 크게 충격을 받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뭐, 곧 추가합격 연락이 오겠거니 하는 생각이 있었고 그 부조화는 친구들이 다들 OT를 떠날 때쯤 깨졌던 것 같습니다.

그제야 저는 제가 원서를 쓸 때 어떤 바보짓을 했는지도 파악했고, 제가 봤던 수능과 치렀던 입시가 매우 혼란속에서 진행되었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안일한 태도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사실도요. 이유를 파악하고 반성하면 상황을 바로 잡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정말로 수능은 다시 안 보더라도 그저 원서만 다시 쓸 기회가 주어진다면 소위 말하는 배치표에서 몇 칸은 더 위에 위치한 학교에도 붙을 자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학민국의 입시제도에서 원서를 다시 쓸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수능을 다시 봐야했고, 수능을 다시 보려면 공부를 다시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수학, 물리, 생물 이런 과목들을 1년 다시 공부할 자신은 별로 없었습니다.

수능을 보고 나서, 혹은 수능을 보기 전부터 높은 곳을 바라보며 재수 준비에 들어간 친구들과 달리 저는 의지와 계획이 모두 부족한 상태에서 재수 생활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학원이라는 곳은 평생 다녀본 적이 없었으니 이제 와서 다니기 시작한다고 해도 적응이 안 될 것 같았고, 학교는 이미 졸업했으니 어디 독서실이라도 등록해서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당시에 저희 집은 제가 태어날 때부터 살았던 동네를 더나서 완전히 새로운 동네에 이사 온 지 얼마 안 된 상황이었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동네에서 공부하면 외로울 것 같아서 다녔던 고등학교 근처에 독서실이 있나 수소문해봤습니다. 학교 근처에는 아는 친구들이 많았으니가요. 하지만 이미 대부분의 독서실에는 자리가 없었고, 점점 먼 곳을 뒤져보다가 간신히 왕십리 쪽 독서실에 자리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2002년의 봄날 아침은 수유동을 출발해서 왕십리를 향해 가는 버스안에서 크고 작은 후회의 감정을 흘려보내는 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후회한다고 해도 '열심히 공부해서 더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야지!'라는 의지 없이 시작한 재수 생활이 즐거울 리가 없었고, 시작한 지 한 두달이 지나자 집에서 일어나는 시간은 점점 고등학생의 기상 시간 보다는 대학생들의 기상 시간에 가까워졌습니다. 16년 전의 그 날은 '그래도 나같은 죄인은 일찍 일어나는 시늉은 하면서 참회해야지'라는 일말의 구속에서도 해방된 첫 날, 그러니까 대놓고 늦잠을 자기 시작한 첫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버스 노선이 9시 이후에 사람이 매우 많아지는 노선이라는 사실도 그 날 처음 알았습니다.

버스가 가다 서기를 반복하면서 10분 정도 달렸을 때, 뭔가 흐름이 바뀌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치 종점에 도착한 것처럼 버스에 탄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리려는 움직임을 보였던 것입니다. 하필이면 제가 서 있던 위치가 출구 근처였기 때문에 내리는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위치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버스가 정류장에 서고 문이 열리자 내리는 사람이 왼쪽에서, 뒤에서, 오른쪽에서 밀려오는 통에 적절한 이동 경로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내리는' 사람들의 흐름 속에서 아직 안 내리는 사람으로의 정체성을 계속 유지하며 존재하기 위해 이리저리 치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짧은 파도가 지나간 뒤 문이 닫히고 버스가 다시 출발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내렸는지, 심지어 빈 자리가 보일 정도였습니다. 적당한 자리에 앉아서 다시 창밖을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그 정거장에서 내렸는지, 왜 9시 이후에 이 노선에 사람이 많아지는지를 한 번에 이해했습니다.

창밖에는 어떤 대학교의 정문과 캠퍼스가 스쳐지나가고 있었는데, 그 학교 캠퍼스가 얼마나 큰지 버스가 한참을 달려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정류장을 몇 개 더 지나서야 사라졌던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몇 개의 정류장을 지나는 동안 버스 안에 남아있던 사람들도 거의 다 내렸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지는 않았지만 원한다면 기사 아저씨와 잡담이라도 하면서 갈 수 있을 만큼 텅 빈 버스에 앉아서 이 복잡한 기분이 무엇일까 생각해봤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에는 착 가라앉은 자존감에 열등감을 몇 방울 정도 뿌린 것과 비슷한 기분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입시 과정에서 느꼈던 인지 부조화를 완전히 버리기는 어려웠는지 내가 도대체 얼마나 큰 잘못을 해서 지금 이런 기분을 느끼고 있나 싶었습니다. 다시 수능을 보고 원서를 쓸 기회를 얻을 때 까지 감당해야 할 시간들도 부담스러웠고, 그 시간동안 이런 비참한 기분을 계속 감당할 자신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한 번 더 실패한다면 그때는 또 어떻게 감당해야 할 까에 생각이 미치자,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성공사례가 마치 모든 사람들의 인생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진리인양 열심히 전파하고 다니는 강사들이라면 이 이야기는 '그래서 그 버스에서 큰 자극을 받아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했고 결국 이렇게 성공했답니다'라는 흐름으로 이어져야 하겠지만 저는 결과적으로 성공하지도 않았고 사실 별로 자극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그저 그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무언가로부터 도망칠 정도의 적극성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기에 그냥 내키지 않는 공부를 대충 하며 시간을 보냈고, 매일 후회하고 매일 짜증을 냈습니다. 그 때 제가 발휘한 적극성은 딱 하나였는데, 더 이상 버스를 타지 않아도 갈 수 있도록 독서실을 집 근처로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2002년은 이 노래의 가사에서 느껴지는 아련함과 사랑스러움과는 정반대에 있었습니다. 비참하고 짜증나고 자기 혐오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했던 시간이었죠. 그로부터 16년이 지났고, 그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중에 그리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16년은 마치 바둑의 계가를 하는 것처럼 정해진 수순을 그대로 따라가는 듯한 느낌의 시간들 이었습니다.

어저면 앞으로의 16년도 비슷하게 흘러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뻔한 이야기가 저에게 할당되어 있다면, 그 사실을 저는 얼마나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16년 뒤에 뭔가 후회를 한다면 그때는 정말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은데 말이죠. 만약 그게 그렇게 무섭게 느껴진다면 저는 지금이라도 뭔가 저에게 적극성이라는 것이 남아있는지 찾아봐야 할 것 같았습니다. 설령 그것이 도망치기 위한 적극성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다만,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숫자들이 캐시 메모리에서 온 것인지 메인 메모리에서 온 것인지부터 파악하고 나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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