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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벨이 울렸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책상에 A4 용지가 쌓였다. 항상 매월 5일은 이랬다. 규정에 정해진 결산기간은 매월 1일 부터 5일이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규정을 '결산은 5일에'로 받아들였다. 첫 날에 오면 10분도 안 기다리고 바로 확인 받고 돌아갈 수 있는데 왜 사람들은 꼭 마지막 날 몰려서 몇 시간씩 기다릴까. 결산서 틀리면 답도 없는데. 라는 의문이 들어서 검사가 끝난 결산서에 도장을 찍어주면서 물어봤다.
"보급관님, 다음에는 첫 날에 오시면 이렇게 안 기다리셔도 될텐데 말입니다." 4시간을 기다렸던 보급관은 결산서를 받아들며 이렇게 말했다. "야, 너네는 31일까지 쓴 걸 그 다음날에 다 합산해서 결산서 만들어올 수 있냐?"
결산은 업무시간을 훌쩍 넘겨서까지 계속 되었고, 한 겨울의 해는 짧았다. 주위가 완전히 어두워져서야 이번 달에 마쳐야 되는 80개 부대의 결산을 다 마치고 막사로 돌아갈 수 있었다. 짧은 길을 올라가면서 고민을 했다. 내일부터는 저 80개의 결산서, 그러니까 1200장의 A4용지를 다시 처음부터 들여다보며 엑셀로 합산을 해서 우리 결산서를 만들어서 상급부대에 제출해야 됐다. 상급부대의 결산 마감일은 매월 15일까지였고, 나에게는 10일 정도의 시간이 있었다. 그 말은 다시 말하면 나도 '결산은 15일까지'라는 말을 '결산은 15일에'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 되었다.
사실 15일에 가까스로 제출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산서를 받을 때 확인을 한다고는 했지만 막상 취합을 하다보면 빠진 것 틀린 것 안 맞는 것 이상한 것 뭐가 뭔지 모르겠는 것 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고, 어쨌든 결산이라는 것은 결국 더하기 빼기가 맞아 떨어져야 되는 것이라서 어디서 전표 하나라도 빠지면 유조차 한 대, 그러니까 기름 2만 리터 만큼의 오차가 발생했다. 내 한 달 월급이 혹한기 경유 1리터랑 비슷했으니까 그 오차를 월급으로 메꾸려면 군대에서 1600년을 일해야 됐다.
절대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결산은 항상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빠진 것을 채우고 숫자를 맞춰나가는 과정이었고, 항상 데드라인에 아슬아슬하게 제출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벌써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타 부대 보급관이 31일까지의 결산을 다음 날인 1일에 바로 제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도 결국엔 스케일은 조금 다르지만 같은 맥락의 이야기였을 것이다.
다음 날이 되었다. 전화벨은 가끔 울렸지만 사람들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결산서들은 책상위에 쌓아놓기가 어려워서 바닥에 정리해두고 위에서부터 한 개씩 꺼내가면서 엑셀에 내용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1년 반 동안 해오던 일이라서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사실 숫자를 엑셀에 입력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그 숫자가 합계를 내보면 잘 안 맞는 다는 것이었다. 모든 부대가 한 달동안 받은 기름의 양은 우리가 한 달 동안 준 기름의 양과 완벽하게 일치해야 됐다. 이론 상으로 1리터도 차이가 있을 수는 없었다. 우리가 어디에 뭐를 얼만큼 줬다는 기록은 전산망에 모두 있었다. 때문에 뭔가 잘 안 맞으면 전산망의 이력을 살펴보고 불일치를 찾아내야 됐다.
그렇게 하나 하나 맞춰가는 도중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전산망에 준 기록이 있으면, 저쪽 전산망에는 받은 기록이 있을 것이다. 얘네들이 써오는 결산서에 적힌 숫자는 사실 전부 전산에 있는 숫자들이고, 우리가 취합하는 내용도 결국 전산에 다 있을거고, 상급부대 전산에도 다 있을텐데 나는 왜 여기서 엑셀에 숫자를 하나씩 치고 있는 것일까. 내가 전산 시스템에 대해서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잘 하면 될 것도 같은데.
그 의문이 풀리지 않고 몇 달이 지났다. 슬슬 사회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상급부대에서 연락이 왔다. '야 너네 왜 전산으로 결산 안하냐?' '예? 여기 프로그램에 결산 기능이 있었습니까?' '야 거기 그 메뉴에서 그거 눌러봐. 거기 결산이라고 있잖아' '와 진짜 있었네. 이거 업데이트 된 겁니까?' '아니 그거 처음부터 있었다는데?' '한 번 써보고 전화드리지 말입니다'
전화를 끊고 버튼을 눌러서 결산 화면을 띄웠다. 뭔가 내가 만들던 결산서와 많이 다른 화면이 떴다. 이게 도대체 의미가 뭘까 하고 한참 살펴보는데 가만히 보니 뭔가 있어야 될 항목들은 다 있는 것 같았다. 와 세상에 이게 2년 전부터 있었던 기능인데 내가 몰라서 여태 못 썼나. 반성을 하면서 화면 여기저기를 눌러봤는데 화면에 도통 의미있는 숫자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 군대에서 쓰는 프로그램이 직관적일 수는 없겠지. 라고 생각하며 캐비넷 한 구석에 처박혀있던 매뉴얼을 찾아왔다.
이론적으로 결산이라는 것은 사실 기존에 주고 받은 내역의 취합이기 때문에, 시스템에 뭔가 입력할 일은 없는게 맞았다. 그리고 매뉴얼에서도 결산 화면의 설명은 정말 간단했다. '(1) 화면에 들어갑니다. (2) 결산을 원하는 달을 입력합니다. (3) 결산 버튼을 누릅니다. (4) 인쇄를 원하면 인쇄 버튼을 누릅니다. (5) 끝!' 내가 뭘 잘못한게 아니었구나 라고 생각하고 결산 버튼을 몇 번 눌러보고, 월을 바꿔서 지난 달의 결산버튼을 눌러보고 내가 만들었던 결산서를 꺼내서 화면의 숫자와 맞는지 몇 번 맞춰보고 잠시 고민을 하다가 전화기를 들었다. '보급관님, 이거 못 쓰겠는데 말입니다.' '야 다른 중대도 그러더니 너네도 그러냐?' '이거 숫자도 안 맞고 기능도 너무 부족한데 말입니다' '기능이 뭐가 없는데?' '일단 LNG 결산은 어디서 하는지 메뉴도 없고 항목도 없고, 보급정지 들어온 것들은 어디서...' '야 기능 없는거 좀 적어서 여기로 보내줘라. 그렇지 않아도 그거 업체에 기능개선 요청해야 되는데 여기선 뭐가 부족한지 모르겠더라' '아 그러면 다음 주까지는 적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전역을 앞두고 지루했던 일상에 이벤트가 생겼다. 나도 어쨌든 학교로 돌아가면 프로그래밍을 다시 배워야 될 것이고, 전산 시스템이라는 것도 익숙해져야 될 테니 이번 기회에 면밀히 프로그램을 뜯어보고 부족한 점들이 어떻게 바뀌면 좋을지 잘 정리하는 것도 좋은 공부가 될 것 같았다. 하다못해 학교에서 레포트 쓸 때도 도움이 되겠지.
몇 일 동안 프로그램의 거의 모든 메뉴를 눌러보면서 '전산으로 결산을 하지 못하는 이유'와 '결산을 하려면 추가되어야 되는 기능'을 문서로 작성했다. 그걸 보던 소대장이 너는 뭘 그렇게 열심히 하냐고 물어봤다. '레포트 쓰는 법을 연습하고 있습니다!'라고 하기에는 뭔가 부끄러워서 '저는 엑셀로 결산한다고 고생했지만 후임들은 편하게 일 하도록 하고 싶어서 열심히 합니다!'라고 했다가 '웃기고 있네'라는 의미의 구박을 받았지만 그래도 열심히 해서 20장짜리 보고서를 완성해서 상급부대에 보내줬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났다. 정말로 사회에 나갈 날이 몇 일 남지 않았는데, 다시 상급부대에서 전화가 왔다. '저번에 시스템 고쳐달라고 한 거 다른 부대에서 고쳐달라고 한 내용들이랑 다 합쳐서 이번에 패치 됐다는데 한 번 확인해봐라' 라는 맥락의 전화였고, 과연 내가 건의한 기능들 중 몇 가지나 반영되었을까 두근거리며 프로그램에 로그인을 했다.
소프트웨어 공학이라는 것은 놀라운 것이었다. 나는 그 많은 기능이 한 달만에 다 구현이 된 것도 믿을 수 없었지만, 그 많은 기능들 중 제대로 구현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도 믿을 수 없었다. LNG는 단위가 리터가 아니라 세제곱미터인데...저건 저기서 더해지는 항목이 아니라 빼야 되는 항목인데..이거 숫자에 쉼표는 왜 빠졌을까..기타 등등.
결국 나는 전산으로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결산 이라는 이상향을 보지 못하고 전역을 하게 되었다. 물론 그 뒤로 그 프로그램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지 못했고, 왜 그게 그렇게 엉망이었는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학교를 다니고 프로그래밍을 배우고 시스템 분석을 배우고 소프트웨어 공학을 배웠지만 시스템이 엉망으로 만들어지는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이론적으로 이상적인 상황이니까 실제 현장에 나가면 다른 무엇인가가 있겠지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10년이 지났다. 나는 그런 종류의 시스템을 만드는 회사에 들어왔고, 그런 종류의 시스템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여러번 경험했다. 그리고 이제서야 뭔가 대충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황이 언제나 이상적일 수는 없었다. 프로젝트의 상황을 설명하려면 소프트웨어 공학 보다는 양자 역학을 들고 오는 것이 더 빠를 것 같았다. 엉망이 상황에 익숙한 사람들은 거기에서 나름의 질서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아무 블럭이나 하나만 빼도 쓰러질 것 같지만 아직 쓰러지지 않고 있는 젠가 같은 안정감을 여기에서도 찾는 것 같았다. 그런 경험이 반복되면 이상향을 위한 목표의식 같은 것도 어느새 향수 비슷한 것으로 바뀌기 마련이었다. 이토록 과정이 이상적이지 않은데 결과물이 이상적이기를 바라는 것도 웃기는 일이 아닌가 싶었다.
나도 그렇게 변하고 있을까 고민을 해봤다.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았는데, 사실 다른 사람들도 '당신 변했어'라고 해봐야 인정할 리 없으니 내가 스스로 난 안 변했어 라고 하는 것도 설득력이 부족한 일이 아닐까 생각했다. 다만 여태껏 잘해온 것 같았는데 이제 와서 목표를 향하기 보다는 상황에 안주하는 사람으로 변해간다면 너무 억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직까지 이 일을 계속 하고 있는 이유가 뭔데.
원래 사람 배신하고 버리고 그러는 것 아니라고 그랬다. 그 사람이 꼭 타인이라는 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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