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학부생 시절의 평범한 이야기입니다. 4학년 때 저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 과목을 수강한 저는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조별과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한 학기 내내 진행되는 꽤 큰 과제였죠. 조는 4명으로 이루어졌고, 잘 모르는 사람들과 같은 조가 되었습니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이라는 과목은 굉장히 평범한 이름처럼 소프트웨어의 개발에 대한 모든 과정을 평범하게 진행하는 과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분석, 설계, 개발, 테스트, 시연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요. 그래서 기능목록 작성이나 유즈케이스 그리기, 시퀀스 다이어그램 그리기 같은 자잘한 과제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분석한 내용을 바탕으로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종의 프로젝트 과제도 크게 걸려 있었고요.

일단 시작은 간단한 과제를 나누어서 하기로 했는데 생각처럼 잘 진행이 되지 않았습니다. 서로 어색해서 일 하기 힘든 걸까, 아닌데 저 빼고 3명은 서로 친해 보이던데 왜 진행이 잘 안될까 하다가 그냥 언젠가는 꺼내놓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말을 꺼냈습니다. 제가 프로그래밍은 다 할 테니까 나머지만 세 분이 나눠서 해주시면 안 될까요?

이 과목에서 프로그래밍은 전체 과제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4명 분량의 조별과제 중 혼자서 절반을 다 하겠다는 제안이었고, 보통 쉽게 나오기 힘든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조원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이었죠. 모두가 좋다고 동의했고 과제는 다시 진행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조원들과 의사소통할 필요 없이 프로그래밍에만 집중할 수 있었고 그럭저럭 시간 내에 과제를 완성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학기말이 되어서 모든 산출물을 정리하여 리포트를 제출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조원들 중 한 명이 - 아마도 가위바위보에서 진 게 아닐까 싶었던 분이 - 저에게 힘들게 말을 꺼내더라고요. 사실 나머지 과제들도 이해가 잘 안 되는데 같이 해주시면 안 되냐고.

뭐, 자주 있는 일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저도 4학년이었고 이것저것 바쁜 일이 많았는데 사전에 약속된 것들이 자꾸 어그러지는 것은 좋은 경험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만든 프로그램에 주석도 엄청 많이 달아놨고, 리포트 정리할 일정을 충분히 드리기 위해서 완성도 엄청 일찍 시켜서 넘겨드렸죠. 일단은 충분히 하나하나 설명을 드렸습니다. 이건 이렇게 하시고요, 저건 저렇게 하시고요. 그랬더니 돌아온 것은 제가 한 설명과 주석이 그대로 복사되어서 작성된 리포트였습니다. 물론 그렇게 제출하면 좋은 성적을 기대하기 어려웠죠. 그래서 그냥 모든 리포트를 처음부터 다시 쓰고 발표자료도 제가 만들고 발표도 제가 했습니다. 다른 세 분이 한 것은 발표하는 날 다른 학생들에게 나눠줄 핸드아웃 - 물론 제가 만든 -을 출력해와서 나누어준 것 밖에 없었습니다.

어쨌든 발표와 과제 제출은 그럭저럭 잘 끝났고 이 과목도 좋은 성적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과제에 참여 안 했다고 교수님에게 몰래 이야기하거나 하는 성격은 아니라서 그냥 다른 조원들과는 그동안 함께해서 힘들었고 다시는 보지 말자 식의 작별인사를 하고 남은 과제들과 시험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에 조원 중 한 명에게 연락이 오더라고요. 혹시 윈도우즈 프로그래밍 수업도 들으시는 것 같은데 그 과목 기말 과제하신 거 좀 보내주시면 안 되나요?

물론 윈도우즈 프로그래밍 과제는 개인 과제였고 제 과제는 보내주기에는 너무 퀄리티가 좋았기 때문에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을 계속 배려하거나 도와준 결과가 결국엔 이런 식으로 돌아오는 것이 조금 서글펐습니다. 아, 제가 할게요. 아, 못하셨다고요? 제가 하겠습니다. 아, 물론 과제 명단에서 빼거나 교수님한테 따로 말하거나 그러지 않을게요. 같이 했다고 할게요. 이렇게 이야기한 것이 저를 만만하게 혹은 쉽게 보이도록 만들었나 싶어서 말이죠.

하나의 상황을 가정해볼게요. 지어낸 상황이고 실제 인물 및 조직, 단체와는 관련이 없는 상황입니다. 아침에 출근을 했는데 사무실 분위기가 뭔가 험악했어요. 순간 아 뭔가 일이 터졌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팝콘을 꺼내고 구경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제 친 사고가 생각났거든요. 어제 저는 동기 한 명과 늦게까지 야근을 했었어요. 같이 뭔가 데이터를 정리하는 코드를 짜고 있었죠. 근데 제가 어제 동기.. 편의상 명교라고 부를게요. 명교한테 실수로 운영 DB의 주소가 데이터 소스로 지정된 설정 파일을 넘겨줬던 거예요. 그리고 명교는 실수로 WHERE 조건을 적지 않은 DELETE 쿼리를 날려버렸고요.

DELETE 쿼리는 데이터를 삭제하는 쿼리고 여기에 WHERE 조건을 붙이면 조건에 맞는 데이터를 삭제하는 명령이 되는데, WHERE 조건을 적지 않으면 모든 데이터를 삭제하는 명령이 됩니다. 저의 실수와 명교의 실수가 절묘하게 결합되어서 운영 DB의 모든 데이터가 지워져 버렸어요. 백업 DB가 어딘가에는 있었을 것 같았지만, 저희는 그게 어디 있는지도 어떻게 복구하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우리 둘은 그냥 모른 척 하자라고 합의를 하고 퇴근을 했어요. 그다음 날 출근했는데 사무실 분위기가 그리 험악했으니 불안할 수밖에요.

역시나 조용히 불안해하고 있던 명교를 몰래 불러서 이야기했어요. 여기는 작은 프로젝트라서 쿼리 로그 같은 게 안 남으니까 누가 지웠는지 모를 거다. 그냥 우리만 입 다물고 있으면 선배들이 백업 DB에서 자료 복구해서 정상화될 거다. 그러니까 그냥 가만히 있자. 그렇게 서로 합의를 하고 자리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뭔가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정말 로그가 안 남았을까? 어떻게든 찾아내려고 하면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정말 확실하게 나는 가만히 있으면 안전할 것일까? 그러다가 순간 떠올랐어요. 쿼리 로그는 남지 않더라도 소스코드 저장소에는 로그가 남는다는 사실을요. 실수를 확인하고 나서 바로 다시 개발 DB주소를 데이터 소스로 바꿔서 저장소에 올리기는 했지만, 제가 한 번은 운영 DB의 주소를 적어둔 설정 파일을 올려두었다는 기록은 아주 확실하게 남아있었고 지울 수 없었죠. 반면에 명교는 자기 소스를 저장소에 올리지 않고 자기 컴퓨터에서만 테스트했기 때문에 명교의 바보 같은 쿼리는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어요. 이러다 내가 다 뒤집어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재빨리 머리를 굴렸습니다. PM님께 찾아가서 이실직고하는 거다. 명교보다 내가 먼저 찾아가서 말하면 된다. 사실 데이터 소스를 잘못 올린 것은 작은 실수고 쿼리를 잘못 날린 것이 이 사태의 본질적인 원인이니까 지금의 모든 잘못은 명교가 WHERE 조건 빼먹은 문제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제가 먼저 가서 말하면 제 실수는 사소하게, 명교의 실수는 커다랗게 부풀릴 수 있었죠. 더 늦기 전에 가서 말하면 되는 거였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PM님이 화를 많이 내실 테니까 지금 살짝 화를 참고 계실 때 차분하게 이야기하면 나는 '어이쿠 이 놈아 데이터 소스 같은 건 조심했어야지' 정도의 문책만 받고 끝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명교를 팔아서 제 불안감을 해소할까 고민하며 명교 눈치를 보는데 명교도 뭔가 표정이 복잡해 보였습니다. 순간 엄청난 불안감이 엄습했습니다. 명교는 결코 멍청한 친구가 아니었고, 충분히 저와 같은 수준으로 계략을 짜낼 수 있는 친구였습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명교가 저보다 먼저 PM님께 찾아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쨌든 쿼리를 잘못 날린 것은 로그가 없으니 그건 말 안 하고 'PM님 제가 소스 저장소 로그를 보니까 누가 멍청하게도 운영 DB 주소를 설정 파일에 적어서 올려놨던 적이 있었는데 그게 누구냐면...' 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면 PM님은 저에게 '어이쿠 이 놈아 개발자가 설정 파일도 제대로 못 다루는 게 말이 되냐? 당장 프로젝트에서 나가렴' 정도의 분노를 표출하실 수 있었겠죠.

상황을 정리해볼까요? 먼저 우리 둘 다 입을 다물고 있는 경우예요. 사실 소스코드 저장소 로그를 하나씩 뒤져볼 만큼 한가한 사람은 없었고 보통 사고가 터지면 개발자들은 현재와 미래에만 관심이 있지 과거를 뒤져보는 경우는 별로 없어요. 일단 빨리 복구해내서 서비스를 정상화시키는 것이 중요한 거죠. 그래서 저희가 둘 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PM님은 전체 개발자들에게 적당한 정도의 쓴소리만 날려주고 이 일은 그냥 묻힐 가능성이 커요. 저희 평가는 적당히 나올 테고요. 아마 저희 연봉도 적당한 수준으로 올라갈 거예요.

만약에 제가 먼저 PM님께 고자질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럼 아마 명교는 프로젝트에서 나가게 될 것이고, 굉장히 낮은 평가를 받을 가능성이 높아지겠죠. 반대로 명교가 먼저 고자질을 한다면 제가 프로젝트에서 나가고 낮은 평가를 받을 가능성이 높아지고요. 항상 서로 비교되는 동기 사이이니까 한 명이 사고를 치고 나쁜 평가를 받았다면 다른 한 명은 상대적으로 훨씬 좋은 평가를 받을 가능성이 높아요. 그래서 사고를 친 사람은 감봉 처분을, 먼저 고자질 한 사람은 수백만 원의 연봉 상승을 이끌어낼 가능성이 있다고 가정하죠.

만약 두 명이 모두 PM님께 서로의 잘못을 고자질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PM님은 자신의 프로젝트에 이런 몹쓸 개발자들이 둘이나 있다는 사실에 무척 상심하면서 두 명 모두에게 나쁜 평가를 줄 가능성이 높겠죠. 다행히도 둘 다 나쁜 평가를 줬으니 상대평가의 은혜에 의해서 연봉은 둘 다 동결되는 정도로 끝날 거예요.

이 상황에서 저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할까요, 아니면 상대방의 잘못을 가서 말해야 할까요? 물론 전지적인 시점에서 상황을 정리해보면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모두에게 좋은 상황이고 둘 다 고자질하는 게 가장 안 좋은 상황이에요. 그런데 제 시선에서 바라보면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쉽지 않아요. 제가 먼저 고자질을 하면 저는 연봉이 크게 오르거나 동결되는 경우가 생기죠. 제가 입을 다물고 있다면 저는 연봉이 적당히 오르거나 감봉을 당할 가능성이 높아지고요. 그러면 저는 입을 다물고 있기보다는 먼저 말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됩니다. 물론 명교도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을 테니 저희는 같이 망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결국 선택할 수 있는 더 좋은 합의가 있음에도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결과적으로 최악의 합의를 하게 되는 상황을 바로 죄수의 딜레마라고 부릅니다. 개인에게는 최선의 선택이 집단과 사회에는 최선의 선택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이론입니다.

이런 상황이 단 한 번이 아니라 계속 반복된다고 가정했을 때의 이론이 반복 죄수의 딜레마입니다. 여기에서 두 명의 죄수는 단 한 번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 선택을 거듭하게 됩니다. 상대와 협력을 해야 할까? 배반을 해야 할까? 한 번의 선택이 이루어지고 난 다음 서로는 서로의 선택을 알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다음 선택을 반복하게 됩니다. 이렇게 선택이 계속될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최선일까요?

실제로 이런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전략은 무궁무진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전략 중 가장 좋은 전략을 찾기 위한 대회가 실제로 있었습니다. 컴퓨터 알고리즘으로 협력과 배신에 대한 로직을 만들어서 그 알고리즘끼리 서로 대결을 계속 펼쳐서 마지막에 가장 높은 누적 점수를 얻은 알고리즘이 승리하는 대회였습니다. 그런데 여섯 번의 대회 중 다섯 번을 우승, 한 번은 준우승을 차지한 알고리즘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첫 대회에서 우승한 이후로 이 알고리즘을 이기기 위해 만들어진 알고리즘들이 다음 대회에 참전했음에도 계속 우승을 거듭한 알고리즘입니다. 이 뛰어난 알고리즘의 이름은 팃포탯(Tit For Tat)입니다. 그런데 이 알고리즘은 사실 엄청나게 간단한 로직을 가지고 있습니다. 딱 세 개의 규칙만 가지고 있었죠.

  1. 최초에는 무조건 협력을 선택한다.

  2. 상대가 배반을 하면 그다음 턴에는 배반을 선택한다.

  3. 상대가 협력을 하면 그다음 턴에는 협력을 선택한다.

이게 전부였습니다. 팃포탯은 우리 말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숙어인데, 말 그대로 상대방이 협력을 하면 협력으로 돌려주고 배반을 하면 배반으로 돌려주는 알고리즘이었습니다. 다만 처음에는 무조건 협력으로 시작하고요. 이 단순한 규칙이 일구어낸 성과는 눈부셨습니다. 물론 모든 알고리즘을 상대로 이기는 무적의 알고리즘은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대회에 참전한 알고리즘 중 All D라는 알고리즘이 있었습니다. 이 알고리즘은 더 간단한데 모든 선택을 배반으로 선택하는 알고리즘입니다. 죄수의 딜레마에서 배반을 선택하는 것이 개인에게는 가장 이득인 것처럼 보인다는 말을 했었죠? 이 알고리즘은 팃포탯을 이깁니다.

첫 번째 턴에서 팃포탯은 협력을, All D는 배반을 선택했기 때문에 All D가 더 높은 점수를 가져가고 팃포탯은 손해를 보게 됩니다. 이후 팃포탯은 배반을 선택하고 All D는 무조건 배반을 선택하기 때문에 모든 턴은 서로 배반하면서 끝납니다. 결과적으로 첫 턴의 이득을 바탕으로 All D는 팃포탯보다 높은 점수를 가져갑니다. 문제는 이 대회는 리그전이라는 점입니다. All D와 팃포탯은 모두 결과적으로 매우 낮은 점수만 가져가게 됩니다. 거의 최저점만 가져가게 되기 때문에 적절하게 협력을 선택한 다른 알고리즘에 비해 누적 점수가 매우 불리해지는 문제가 생깁니다. All D의 이런 부정적인 태도는 결국 다른 알고리즘들이 바보 같이 협력만 선택하지 않는 이상은 평균적으로 매우 낮은 점수를 획득하게 되고, 대회에서는 두각을 드러낼 수 없게 만들어 줍니다.

반면에 팃포탯은 All D와 같은 알고리즘을 제외한 다른 알고리즘과의 대결에서는 적절하게 협력을 함으로써 평균적으로 높은 점수를 가져가게 됩니다. 팃포탯의 단순한 규칙 속에 숨겨진 가장 놀라운 요소는, '네가 나에게 협력해야만 너에게도 이득이다'라는 점을 상대방에게 알려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서로 협력을 취하면 모두 좋은 점수를 가지고 대결을 끝낼 수 있음을 알려주면서 동시에 상대방이 한 번이라도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배반을 선택할 경우 즉시 보복함으로써 그것이 이득이 아님을 알려준다는 것이죠. 더 놀라운 것은 배반을 선택한 상대가 협력을 선택할 경우 즉시 용서하고 다시 협력 관계로 돌아간다는 점입니다. 생각하는 것이 많은 알고리즘들은 이러한 팃포탯을 상대할 때 협력적인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협력적인 태도들을 바탕으로 팃포탯은 항상 높은 점수를 가져가고 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컴퓨터 알고리즘을 이용한 학술적인 이야기가 아닌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를 해볼까 해요. 조금 극단적으로 세계대전이 있었을 때로 가보겠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벌어졌을 때, 독일군은 원래 서쪽 전선을 빠르게 정리하고 러시아와 전면전을 펼칠 생각이어요. 그런데 세상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은 그 당시에도 마찬가지여서, 서부 전선은 빠르게 정리되지 않았고 독일은 양쪽을 모두 신경 쓰며 전쟁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독일이 생각한 것은 참호전이었습니다. 참호를 파고 거기에서 방어하기 시작하면 상대방은 쉽게 진격할 수 없게 되거든요. 점령한 지역을 매우 적은 병력으로 방어할 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남은 병력을 원하는 지역에 집중시킬 수 있었고요. 물론 연합군도 마찬가지로 적은 병력으로 대치구도를 만들기 위해서 참호를 파고 들어갔습니다. 상대만 유리하게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물론 참호에 있는 적을 공격할 수 있는 방법은 많이 있었습니다. 곡사화기를 통해서 상대 참호에 포격을 가할 수도 있었고, 공격의 방향을 틀어서 상대방의 참호로 탄약과 식량을 보급해주는 보급부대를 공격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 편이 상대방의 보급부대를 공격해서 적들을 굶길 수 있다는 소리는 상대편도 똑같은 것을 할 수 있다는 소리가 됩니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했겠죠. 밥 먹는 것은 중요한 문제잖아요.

그렇게 소모적인 전투가 계속되자 양 쪽 군인들은 문득 밥도 못 먹게 하는 것은 조금 치사한 일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서로 상대방의 지역을 점령할 의지도 없이 대치하고 있는데 그러면 서로 죽일 이유도 없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도요. 물론 엄격한 군법이 있었기에 서로 메시지를 주고받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대치가 길어질수록 전투 양상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상대방의 보급을 끊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 되었고, 곡사화기를 통한 포격은 상대방을 죽이지 않는 위치에 떨어졌어요. 심지어 시간도 점점 일정해졌습니다. '저녁 7시부터는 상대방이 포격을 시작하니 밖에 나돌아 다니지 말 것'같은 공지가 내려오기 시작했죠. 서로 깃발을 꽂아서 저격수가 저격하지 않는 지역을 만들기도 했고요. 그러다가 분위기 파악하지 못하는 신임 장교가 공격을 지시에서 상대방에게 사상자를 내면, 상대방은 암묵적인 룰을 어긴 것에 화내면서 마찬가지로 공격을 해서 비슷한 피해를 상대방에게 주게 됩니다. 물론 전면적으로 이끌고 가서 더 큰 피해를 주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그러면 서로에게 사상자가 많이 나오는 전투가 벌어지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보복도 받은 피해와 비슷한 정도로만 이루어졌습니다.

가장 극단적인 대립 상황인 전쟁 중에서도 서로의 협력이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이 상황은 실제로 기록에 남아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상황을 재미있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죄수의 딜레마와 팃포탯이 가지고 있던 규칙이 매우 자연스럽게 생겨났다는 점입니다. 오랫동안 대치하다 보면 서로에게 협력하는 것이 이득이라는 점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는 점이지요.

이러한 내용은 로버트 엑설로드의 협력의 진화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들을 인용한 것인데요, 이 책의 결론은 굉장히 희망적인 편입니다. 결국 이러한 사례들을 종합해서 봤을 때 인간은 서로 협력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오거든요. 그것은 사람들이 원래 선한 마음이 가득하건, 사실은 굉장히 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더라도 상관없다는 거예요. 결국엔 협력하면서 사는 것이 개인에게도 유리하다는 것을 알게 될 테니 사회는 그런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건 사실 정말 거시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봤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는 당장 지금이 가장 중요한데요, 지금 한 순간 기뻐하고 한 순간 아파하는 것들이 있는데 '장기적으로 보면 서로 협력하는 것이...' 어쩌고 하는 것이 귀에 들릴 리가 없죠. 결국엔 언젠가는 서로 돕고 돕는 방향으로 진화할 것이라고 믿고 감수하기에는 지금 나에게 주어지는 부탁들, 던져지는 일들, 세심하지 못한 말 한마디에서 오는 상처가 크지 않나요? 내가 일을 빨리 끝내고 다른 사람들을 빨리 도와야지 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해서 이것도 내가 저것도 내가 그것도 내가 했는데 결국 돌아온 게 '이거랑 저거랑 그거 다 했으니 마무리도 네가 하렴'이라면 어떻게 다음에도 같은 상황에서 우리가 '협력'이라는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사실 더 큰 문제가 있어요. 사람들이 서로 돕지 않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는 거죠. 상대방이 화내지 않을 정도로 비협조적으로 나가야만 나에게 유리해진 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만 가지고 큰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진짜 문제는 다른 살마들도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단정 지어 버린다는 점입니다. 무척 협조적이고 배려가 넘치는 사람을 만나면 처음에는 뭔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해요. 다른 의도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다음에는 바보 취급을 해요. 세상 사는 법을 잘 모른다고 생각하고 그 사람을 최대한 이용하려고 노력해요.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요. 그러다 그 사람이 못 견디고 화를 내면 '역시 다른 생각이 있었어'라면서 만족해하죠.

세상이 결국 협력하는 방향으로 진화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은 대학교의 실험실에서나 할 수 있는 발상이 아닐까요? 정말 협력을 우선시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도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상처를 많이 받고 비협조적인 사람으로 바뀌어가는 게 지금의 세상인 것 같은데요. 서로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것이 유리하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이 알기까지 어느 정도의 사긴이 걸릴까요? 저희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런 순간이 찾아올 수 있을까요? 지금의 사회에서 착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몇몇 사람들은 경쟁에서 밀려서 도태되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면 서로 도우며 살아야 하나요? 누군가가 나를 아껴준다는 느낌이 무척 그리워지도록 사람들이 나를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도 여전히 서로 계속 도우며 살아야 하나요? 언젠가는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는 믿음 하나 만으로 그 모든 것을 감수해야 할까요? 내가 손해를 보고 상대가 이득을 보는 모습을 계속 보고 있더라도 참아야 할까요? 아니면 아주 약간의 이득이라도 보기 위해서 나도 배반을 선택해야 할까요?

세상은 게임처럼 명확한 규칙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죄수의 딜레마와 같은 게임이론을 딱 들어맞게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전략을 따지는 것만큼 피곤한 일도 없고요. 돕고 싶으면 돕는 거고 돕기 싫으면 안 돕는 것이지 머릿속에 점수를 계산하면서 살면 너무 피곤하잖아요? 다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거죠. 상처를 받거나 고마움을 느끼거나 그런 건 다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은 마음속에 후회를 남기지 않는 것이 좋은 선택이 아닐까요? 계산적으로 변하는 것이 그렇게 합리적이어서 인간이라면 추구해야 할 고등한 진화 방향인가요? 도움받지 못할 것을 생각하면서 도와주지 않는 것도 보답을 바라면서 도와주는 것도 다 웃긴 일처럼 보이는데요.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세상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살면서 수도 없이 많은 상황에서 협력과 배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됩니다. 그 선택과 그 선택으로 인해서 벌어진 결과에 대해서 하나하나 신경을 쓰고 생각을 많이 하는 것도 참 힘든 일인 것 같아요. 그냥 자신에게 끌리는 선택을 하는 것이 차라리 덜 피곤한 일인 것 같아요. 그 선택을 하는 스스로의 마음을 믿는다면 나의 선택이 내가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나를 이끌어줄 거라고. 저는 그렇게 믿어요.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나치다  (2) 2012.02.22
떨어지다  (0) 2011.11.05
One Stable Build  (0) 2011.09.11
상품, 디자인, 그리고 시장  (0) 2007.10.14
우리는 모두.  (0) 2006.12.15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