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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떨어지다

June 2011. 11. 5. 02:16
떨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나는 전화를 걸기 위해서 번호를 입력하고 통화 버튼을 누를때는 항상 손가락에 망설임을 담아서 버튼을 누르곤 했는데, 그 날은 그 망설임이 정말 심했다. 이미 마음의 결정은 어제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실행에 옮기려니까 내가 결정을 잘못한 것은 아닐까. 나중에 정말 후회하는 것은 아닐까. 난 원래 미친짓 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런 생각이 막 들어서 버튼을 누르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눌렀다. 지금 생각해도 꽤 과감했던 것 같다. 벨이 몇 번 울리고,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냐고. 그래서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저 졸업 좀 연기시켜 달라고. 그러자 반대편에서 대답했다. 학번하고 이름 알려주세요. 그래서 대답해줬다. 그러자 다시 대답이 돌아왔다. 처리되었습니다. 졸업연기 처리에 걸린 시간은 통화버튼을 누를까 망설이던 시간보다도 짧았다.

졸업이 취소되면서 유일하게 합격했던 회사의 합격도 같이 취소가 되었다. 그래서 망설임이 컸다. 어떤 회사도 나를 면접까지 보낼 가치도 없다고 판단했다. 사실 서류 조차도 붙기 힘들었다. 그동안 나름 착실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그리 매력 없는 지원자였나 보다. 그 와중에 붙고 나서 고민하는게 싫어서, 임원면접때 마지막으로 궁금한거 있으면 물어보라고 했을 때 "여기 OS 만든다는거 정말 나오기는 나오나요?"라고 물어봤던 회사만이 최종합격 판정을 내렸다. 처음으로 올라간 면접에 이런 성과면 괜찮은거 아닌가 생각하면서 나는 그 회사에 불합격 판정을 내렸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알아봐주는 사람한테 끌리기 마련이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이제 더 이상 취업준비를 하는 것도 힘들고, 더 이상 떨어지고 상처받는 것도 싫은데 그냥 이 회사에 들어갈까. 라는 생각이 안 들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때 더 가고 싶었던 회사에서, 예정에도 없던 인턴 채용을 실시했고, 나는 그 때 정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그리고 그 회사의 최종면접을 보러 오라는 통보를 받았을 때, 이미 합격했던 회사를 마음속에서 차버렸다. 미안하지만 나 보다 더 어울리는 좋은 구직자가 있을꺼라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회사에 가고 싶었다.

최종 면접이 있던 날. 사당에 위치한 면접장소에 도착하자 온몸에 긴장이 넘치기 시작했다. 정말 마지막 기회였다. 여기마저 떨어져버리면 반 년을 더 놀아야 되고, 또 그 끔찍한 취업과정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되었다. 자기소개서를 쓰고, 불합격 화면을 보고, 그 충격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다른 회사의 자기소개서를 쓰고, 면접을 위해서 다이어트를 하고, 혹시나 감기라도 걸리지는 않을까, 실수하지는 않을까 걱정하고, 면접에서 돌아와서 그 때 그 소리는 하면 안 됐는데 하고 후회하면서 잠도 못자는 시간들이 한 번 더 반복되어야 했다. 그냥 여기에 붙으면 나도 좋고 이 회사도 좋고 다 좋은게 아닐까 싶었다.

보통 회사들은 경쟁률이나 합격자 수를 잘 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이 회사는 꽤 솔직했다. 최종 면접까지 올라온 분은 42명입니다. 그 중 12명이 채용될 예정입니다. 최종면접 치고는 높은 경쟁률이었지만, 해볼만한 경쟁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의실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순서가 되어서 면접장으로 향했다. 면접관은 4명, 면접을 보는 사람도 4명이었다. 이미 예전에 지원했다 차버린 회사에서도 4:4 면접을 두 번이나 봤기 때문에 익숙한 구도였다. 이런 구도면 가운데 자리가 유리한데..라고 생각했지만 안타깝게도 가장 끝에서 따라가게 되었다. 면접장 문 앞에 도착해서 잠시 기다리는 동안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했다. 그런데 잘 되지 않았다. 떨려서 숨을 제대로 들이 쉴 수가 없었다. 마치 고백하기 직전인 것 같았다.

지다

면접장에 들어갔다. 면접을 보는 사람들은 남자 3명에 여자 1명. 보통 IT회사에서 면접을 볼 때는 이런 비율이 많을 것 같기도 했다. 순간 만약 여자 3명에 남자 1명이었다면 내가 좀 더 주목받을 수 있었을 텐데, 아니면 내가 여자였다면 조금이라도 눈길을 끌었을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이력서는 별로 대단한 것이 없어서 눈에 띄지 않을텐데. 라는 걱정이 들었다. 그래도 전공쪽으로 물어보면 잘 대답할 수 있으니까 대답할 기회가 한 번만 걸리면 놓치지 말자고 다짐했다.

면접관들이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음료수라도 한 잔 마시고 시작하라고 했다. 그러더니 문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나보고 문 밖에 있는 음료수 좀 가져올 수 없냐고 부탁했다. 나가서 쥬스와 종이컵을 들고 와서, 종이컵에 쥬스를 따라서 면접자들에게 나눠주었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된 것 같았다. 좋은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다대다 면접에서는 평범해서는 도저히 붙을 수 없으니까. 경쟁률을 생각하면 4명 중 1명만 붙는다. 그 한 명이 내가 되려면 무조건 가장 인상에 남아야 된다.

인상을 남기기 위해서 준비한 것이 몇 가지 있었다. 내가 어도브에서 공인한 Flex Expert라는 것을 말하면 어떨까. 내 전공 평점이 몇 점인지 말해주면 놀라지 않을까. UI 디자인 공모전에서 수상한거 말해주면 잘하는게 많다고 인정해주지 않을까.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꺼낼 기회가 있으리라고 장담할 수가 없었기에, 자기소개때 은근슬쩍 말을 꺼내보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게 너무 마음에 안 들기는 했다. 잘난 척 하는 것도 싫지만, 잘난 척 하지 않는 척 잘난 척을 하는 것은 정말 너무 싫었다. 하지만 그래야 되는게 자기소개 였다. 어제 저녁부터 마음 속으로 수도 없이 외우고 있었던 자기소개를 생각하면서, 왼쪽 부터 시작하라고 하면 나부터니까 자 이제 자기소개 시작이다. 라고 생각했을때 면접관이 자기소개는 뻔하니까 생략하자고 했다.

그렇게 면접이 시작되었다. 평범한 질문과 답변이 이어졌다. 그런데 나한테는 질문이 오지를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먼저 말을 꺼낼 수도 없는 곳이 면접장이었다. 그러다가 중간에 전체에게 돌리는 질문이 한 번 왔다. "회사에 들어오면 뭐가 제일 하고 싶으세요?" 너무 진부해서 면접대비할 때는 식상하게 준비하던 그 질문. 이 회사의 계열사 중에서는 물류쪽이 제일 큰 편이니까 나는 물류쪽에 관심이 많다고 해야겠구나. 마침 학교도 물류 특성화 대학이고, 군대에서도 물류일만 줄창 했었네. 라고 이미 마음을 먹고 왔었다. 혹시나 정말 관심 많냐고 물어볼까봐 1PL, 2PL, 3PL, 4PL이 뭔지도 외우고, 아니 이해하고 있었다. 앞으로의 전망을 말해보라고 해도 말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저는 물류에 관심이 많아서 물류쪽 시스템을 유지보수 하는 일이 적성에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면접관이 나를 바라보면 말했다. 다음 분 말씀해주세요.

다시 평범한 질문 답변이 이어졌다. 이 면접이 최종면접이기는 하지만 최초면접이기도 했는데. 면접장 분위기는 마치 거의 다 붙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형식상 최종면접 같은 분위기였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이런 질문 답변으로 어떻게 4명 중 한 명을 고른다는 것이지? 면접장에 들어와서 20분이 지나도록 대답을 한 질문은 하나 밖에 없었다. 도대체 그런 걸로 나를 어떻게 판단하겠다는 것이지? 면접 시간은 30분이었는데. 남은 시간이 얼마 없는데.

다시 질문이 왔다. 또 면접자 모두에게 돌리는 질문이었다. 회사생활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가치 두 가지를 말해보세요. 왼쪽 분 부터.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중요한 가치는 커뮤니케이션 입니다. 서로의 생각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오해가 조금씩 생기기 시작하면 그 어떤 일도 제대로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특히 회사 생활이라는 것이 혼자 일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과 같이 일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전달하고, 상대방의 의사를 분명히 받아들이지 않는 다면 그 사람도, 그 사람이 속한 조직도 발전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까지 말하고 잠시 생각했다 .두번째는 뭐라고 할까. 그런데 면접관들은 이미 흥미를 잃은 듯한 눈빛이었다. 내 피해의식에 비친 모습일지도 모르겠지만. 대충 대답을 마무리 짓자 역시나 면접관들의 시선은 내 옆에 앉아있던 여자지원자에게 옮겨갔다. 그 지원자가 뭐라고 대답하는 지는 안 듣고 있으면서 시간을 계산해봤다. 이제 거의 끝날 시간인데 설마 저런 질문 두 번으로 면접이 끝나는 것일까.

그런데 정말로 면접이 끝나버렸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도 물어보지 않고. 수고했다고 나가라고 했다. 회의실에 가자 진행요원이 면접비를 챙겨주었다. 지하철 타고 가면 되는데 라고 생각하면서 면접비를 받고 바로 건물 밖으로 나갔다. 바깥 공기를 들이마시는데, 문득 더 이상 떨고 있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나는 면접관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일텐데. 이 회사는 나를 놓치면 후회할텐데. 나를 좀 더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고 나에게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내 첫 인상만 보고, 내 스펙만 보고 나를 다 알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정말 잘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는데, 보여줄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그만한 가치도 없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나도 나한테 관심 없는 사람한테는 관심 없다. 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 내가 뭐가 아쉬워서. 그렇게 생각하니 뭔가 이기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가고 싶었다. 혹시나 나를 받아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마음 한 구석에 자꾸 생겨났다. 매달리고 싶고 애원하고 싶었다. 떨어지고 상처받기 싫어서 '떨어졌어'라고 이미 마음속에서 이미 정리를 했으면서도, 자꾸 희망적인 상상이 머리 속을 덮어서 지울 수가 없었다. 이러면 지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질 수 밖에 없었다.

떨어지다

마지막 학기 였지만, 놀아서 뭐하냐는 생각에 수업을 많이 들었더니 학기말에 과제가 많이 몰렸다. 특히 프로젝트 과제들의 압박이 심했다. 전 날에도 새벽까지 과제를 하다가 쓰러지듯이 잠에 들었던 어느 날 이었다. 다행히도 수업이 오후 3시부터 시작되었기에 마음 놓고 잘 수 있었다. 그런데 꿈 속에서 면접을 본 회사의 최종 결과를 확인하는 꿈을 꾸었다. 컴퓨터에 내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고 확인 버튼을 누르자, 500 에러가 떴다. 다시 새로고침을 하고, 다시 한 번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고 확인 버튼을 누르자, 매우 느리게 화면이 갱신되었다. 불합격 입니다. 숭간 망연자실한 기분으로 앉아있다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거 꿈인가. 정말 꿈이었다. 마음 속으로 정말 다행이다, 정말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꿈이 꿈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다들 그러듯이 잠에서 천천히 깨어났다. 일어났는데 핸드폰에 문자가 하나 도착해있었다. 인턴 프로그램 최종결과가 등록되었습니다. 확인해주세요.

순간 튕기듯이 일어나서 컴퓨터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부팅이 되려면 1분은 걸렸다. 그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핸드폰으로 인터넷에 접속했다. 당시에는 스마트폰이고 뭐고 없었지만 그래도 핸드폰으로 인터넷은 되던 시절이었다. 제발 액티브X 같은 건 없기를 바라면서 합격자 결과를 확인했다. 주민등록번호를 넣고, 확인 버튼을 누르고. 원래 이런 류의 확인은 느릿느릿하지만, 2G 핸드폰으로 확인하려니 정말 느렸다. 정말 느리게 한 줄 한 줄 뜨는 화면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 처럼 슬로우 모션이 걸린 듯 극적으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말 느릿느릿하게 내가 떨어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핸드폰을 침대위에 집어던지고는 세수를 하고 돌아와서 켜진 컴퓨터로 다시 과제를 하기 시작했다. 그 과제는 A+을 받았다.

그리고 2년 반이 지났다. 나는 결국 반 년을 더 놀았고, 또 지겹도록 자기소개서를 쓰고, 서류 탈락 화면을 바라봐야 되었고, 그 와중에 나를 알아봐주는 회사를 만나게 되서 그 회사에 취직해서 2년째 일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회사도 나를 좋아하는 것 같고, 나도 회사를 좋아하는 것 같다. 적어도 회사는 나를 자르지 않을 것 같고, 나도 다른 회사에 가지 않을 것 같으니까. 당연한게 아닌가 싶어도 요즘엔 그게 그렇게 당연하지만도 않은 것 같다.

사람들은 누구나 거절을 하기도 하고, 거절을 받기도 한다. 그리고 그게 무서워서 아무것도 못할 때도 많다. 한 때는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이 한 점에 집중되어 있다가도 잘 안 풀리면 이내 포기하고 떠나기도 한다. 그러다가 그냥 저냥 살아가기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가끔은 그냥 모든 것을 걸고 미친 짓을 해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후회할 때도 있다.

면접장을 나와서 면접비를 받고 건물 밖으로 나오면서, 나는 확실히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나한테 관심조차 없었으니까. 2번의 대답만으로 내 잠재력을 파악했을리가 없었으니까. 건물 밖으로 나와서 지하철역을 가려면 어떻게 가야지 주변 지형을 가늠해보고 있는데 뒤에서 방금 봤던 면접관 2명이 담배를 피러 나왔다. 순간 그 자리를 피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단 아무 방향이나 잡고 도망치듯이 걸어갔다. 진부하게도 그 방향은 잘못된 방향이었고, 나는 걸어온 길을 되돌아 가지 않으면서도 사당역을 찾아가기 위해서 꽤 먼 길을 돌아야 됐다.

하지만 이왕 떨어진 마당에, 그 때 면접관들에게 말이라도 한 번 더 걸어볼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2년 반이 지났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떨어졌다는 사실을 마음 속에 인정하고 있었으니까, 다시 볼 사람들도 아니니까 가서 따지거나 때를 쓰거나 울거나 애원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러면 뭔가 상황이 바뀌지는 않았을까.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뭐라도 다 해봐야 된다고 생각하면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아닐까. 그 회사에 못 가게 된 것은 전혀 아쉽지 않은데, 그 때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이 계속 아쉬울 것이었으면 그 아쉬움은 남기지 말아야 되었던거 아닐까.

하지만 다른 생각도 든다. 그건 정말 확률 낮은 도박을 위해서 나 자신을 너무 비참하게 만드는 일이다. 애초에 나에게 마음이 없었던 회사에 내가 아무리 매달린다고 해봐야 그건 그냥 상대방에게는 귀찮음일 뿐이다. 내 가치가 상대방이 생각하는 것 보다는 훨씬 높다고 믿고 있다면, 상대방이 지금 엄청난 사람을 차버렸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중에 언젠가는 그 가치를 알아봐주는 훨씬 더 좋은 회사가 있을테니까.  구차해질 필요도, 치사해질 필요도 없다. 나는 비록 이번엔 떨어졌지만, 그렇게 떨어지는 사람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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