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기 위해서 에디터를 열면 처음 보이는 것은 하얀색의 광활한 여백입니다. 그 여백을 빽빽한 이야기로 채우는 것은 언제나 쉽지 않은 일이고, 특히나 적절한 첫 번째 문장으로 운을 떼는 것은 그 글의 운명을 좌우할 만큼 중요하기에 언제나 고민이 많은 일이기도 합니다. 저는 보통 적절한 첫 문장이 생각나지 않으면 그냥 습관적으로 '언제'라든지 '어디에서'로 시작을 하는 것을 좋아하고 보통은 그 두 가지를 섞어서 시공간을 담고 있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것을 가장 좋아합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LA에 있었을 때의 일이었는데'로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LA 국제공항에서 순두부때문에 마약 단속에 걸린 이야기로 이어갈 수 있고, 이렇게 일단 시작하면 처음 3~4 문단을 아주 쉽게 써 내려가면서 생긴 가속으로 마무리 ..
제가 샌디에고에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퇴근할 때만 되면 항상 비가 딱 기분 나쁠 정도로 내리던 시애틀에 머물고 있던 저는 말로만 듣던 '캘리포니아 날씨'와 '남부 해안가 날씨'를 모두 경험할 수 있는 도시, 미국의 대표적인 휴양도시이자 은퇴한 부자들이 많이 사는, 미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라는 평을 받고 있는 샌디에고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습니다. 트로피컬 하우스로 가득 채운 플레이리스트를 재생시키며 샌디에고에 도착한 저는 애시드 재즈가 어울릴만한 '비 내리는 샌디에고'를 목격하고 다소 당황했고, '샌디에고에는 1년에 비가 하루 이틀 정도만 오는데 그걸 봤으니 이거 참 진귀한 경험 아니겠냐'라고 떠드는 우버 드라이버의 말에 다소 우울해졌습니다. 차 안의 분위기가 비 내리는 파이크 플레이스 만큼이나..
무언가 잘 안 풀리는 코드를 계속 들여다보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핸드폰이 짧게 울리면서 알림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습니다. 제 인생 패턴을 기준으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오후 8시 이후에 오는 알림은 보통 언제 가입했는지도 모를 사이트에서 보내는 별 의미 없는 메일들, 누군가가 내가 편집했던 문서를 업데이트했다는 알림, 어딘가의 단톡방에 전달된 의미 없는 신문 기사들이 대부분이었기에 저는 아무런 설렘이나 기대 없이 기계적으로 알림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핸드폰을 들어 올리자마자 눈에 들어온 메시지는 제 예상을 벗어나는 것이었고, 뭔가 심장이 뛰는 듯한 느낌을 들게 해 주었습니다. 실제 메시지는 매우 사무적이었지만 제가 읽었을 때의 감상으로 번역해서 다시 작성하자면 대충 이런 메시지였습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