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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2012

June 2018. 8. 12. 02:19

일주일에 110시간씩 일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게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듣기는 했는데 내가 그렇게 일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 사실에 강한 유감을 표명하고 싶었는데, 주위에 120시간씩 일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조용히 있었다. 조용히 모든 일상을 일하는데 투자했지만 일은 잘 안 됐다. 프로젝트가 끝나더라도 뭔가 얻는 것이나 배워가는 것이 있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지난 시간들을 대손 충당금으로 잡아둬야겠다고 마음 먹을 무렵, 프로젝트가 부지불식간에 끝나버렸다.


프로젝트에 들어갈 때는 20대였는데, 프로젝트가 끝나니 30대가 되어버렸다. 오랜만에 서울로 올라오면서 세상이 참 많이 바뀐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실제로 흐른 시간은 3개월밖에 되지 않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프로젝트를 하면서 다시는 이런 곳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시는 이런 곳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이런 곳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도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누구도 상처받는 일을 자연스럽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나도 더 이상 상처받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짐을 하거나 각오를 할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서 그냥 생각만 했다. 언젠가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힘들었던 과거가 자꾸 미화되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이지만, 그렇다고 힘들었던 순간들에 얽매여서 아무것도 못 하는 것도 그렇게 낭만적인 모습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다음 프로젝트를 위해 본사로 복귀할때 되도록 의욕에 넘치는 모습으로 사무실 문을 열고 싶었다. 사실 그 때는 막 서른 살이 되었을 때여서 그랬는지 가만히만 있어도 의욕이 절반 정도는 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나머지 절반은 어디에서 채워야 할 까 고민을 하다가 미래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입사 후 지금까지 외부 프로젝트만 돌았기 때문에 회사 사람들은 내가 일을 어떻게 하는지, 어떤 것을 잘하고 어떤 것을 못 하는지를 잘 모른다. 어쨌든 나는 개발자이니까 개발 업무를 맡게 되면 그걸 잘 해내는 것이 첫 번째라고 생각했다. 환경이 조금만 도와주면 일을 잘 해내면서 동시에 실력도 올라갈 것이고 착실하게 실력을 늘려나가서 한 십 년쯤 뒤에 최고 수준의 개발자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미래일까 생각을 해봤다. 그렇게 되면 한 15년쯤 뒤에는 프로젝트의 리더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다시는 이런 지옥 같은 곳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다짐으로 치환할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보니 의욕이 기준치를 초과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매우 자신감에 넘치는 걸음으로 사무실 문을 열고 '이제 제가 돌아왔으니 업무를 주시죠'라는 요구사항을 당당하게 내놓았고, 그날 나는 프로젝트 리더 자리를 받았다.


가끔 원가절감이 필요할 때를 제외하면 언제나 인력이 부족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회사와 부서의 패시브 스킬이었지만 얼마나 사람이 없었으면 나한테 리더 자리를 주었을까 생각해보니 회사가 무척이나 불쌍해 보였다. 생각을 조금 정리하고 나서, '저는 3년 차 사원인데 제가 리더를 하면 팀원들은 도대체 어떻게 구성되는 것입니까'의 요지로 질문을 하니 회사는 2년 차 사원 두 명과 신입사원 한 명을 포함한 프로젝트팀을 구성해주었다. 그래도 프로젝트 규모가 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가, 그런 것에 좋아할 때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나 자신을 챙기는 법도 잘 모르는데 어떻게 후배들을 챙겨가면서 프로젝트를 해나갈 수 있을까. 이 친구들은 프로젝트 경험이 없거나 적어서, 이번 프로젝트에서 배우는 것들이 정말 중요할 텐데 그 소중한 것들을 내가 어떻게 만들어서 전달해줄 수 있을까. 그런데 정작 나도 프로젝트 경험이 많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니 울고 싶어졌다. 프로젝트 세 번 들어간 선배가 두 번 들어간 후배들에게 어떤 가르침을 줘야 될지 걱정하고 있는 꼴을 남들이 보면 얼마나 우습게 생각할까.


결국 어떤 다짐이나 각오를 세우기 전에 프로젝트가 시작되어버렸다. 다행히도 인생의 레벨 디자인이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니었는지 프로젝트 자체는 악의적인 의지가 가득한 상태로 시작하지는 않았다. 많은 관계자가 협조적인 편이었고, 업무량도 평범한 수준이었다. 이대로만 진행되면 나중에 누군가가 프로젝트를 어떻게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었냐고 물어보면 매우 겸손한 표정으로 운이 좋았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프로젝트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설계서를 써주기로 한 사람이 갑자기 다른 프로젝트로 납치당해버리는 이슈가 생겼다. 그 다른 프로젝트가 우리 프로젝트에 비하면 너무나 대단한 프로젝트였기에 그 사람을 돌려달라고 이야기해봐야 결국엔 우리 프로젝트의 초라함만 느끼게 될까 봐 그런 소리도 못 했다. 속상한 기분으로 이걸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내가 설계서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 번도 써본 적은 없지만, 어차피 설계서 없이 개발한 적도 많으니 그 비어있는 중간을 채우는 것이 못 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다행히도 설계서를 쓰는 것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후배들은 내가 만들어준 설계서로도 개발을 잘 해줬다. 하지만 프로젝트의 절대적인 업무량이 늘어난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니 프로젝트의 전체적인 개발 속도는 느려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다들 일주일에 40시간 남짓 일하고 있는데, 이대로 가면 업무 시간이 천천히 늘어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내가 일을 더 하면 어떨까 고민하다가, 그것은 답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나에게 주 50시간이나 60시간쯤 일하는 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고, 그렇게 일해서 다른 사람들의 업무량을 줄일 수 있다면 기쁠지도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무언가를 감당해야 해결되는 상황이라는 것 자체가 있으면 안 되니까.


그래서 마음을 단단히 먹고, 매우 비장한 표정으로 주간회의에 들어가서 '저희 사람을 한 명 더 주시죠'라고 요구했다. 사람 한 명을 늘린다는 것은 우리 프로젝트 입장에서는 규모를 25%P 늘리는 일이었고, 보통 IT업계에서는 명시적인 손해가 발생하기 전에는 사람을 추가 투입하는 일을 꺼린다. 그리고 당시에는 야근이나 주말 출근을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했기 때문에 야근도 주말 출근도 하지 않는 프로젝트가 일이 많다고 사람을 달라고 하는 요구는 먹히지 않을 가능성이 너무 높았다. 당시에 나는 어렸지만 그 정도는 알았기에 필요하다면 크게 싸워서라도 요구사항을 전달하고, 설령 인원을 늘릴 수 없더라도 프로젝트 목표를 축소하는 정도의 당근은 받아와서 후배들에게 나눠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요구사항을 뒷받침하는 논리를 정교하게 준비하고 '리더는 싸우는 사람은 아니지만 싸워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해'라는 결연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사람을 더 달라고 요구했는데, 부서에서 사람을 더 줬다.


아무래도 운이 좋았다고 대답할 때는 겸손한 표정이 아니라 진심 어린 표정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때마침 그때 미투입 상태의 신입사원이 있었다니. 회의가 끝나고 후배들에게 당근이 아니라 동생이 생겼다고 이야기해줄 수 있어서 기뻤다. 무엇보다도 이슈가 생겼을 때, 우리 업계에서 당연하게 생각하는 초과근무로 이슈를 해결하는 것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이슈를 해결했다는 사실이 마음을 희망으로 가득 차게 만들어줬다. 매번 운이 좋지는 않겠지만 계속 이런 식으로 하다 보면 나도 뭔가 바꿔나가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몇 번의 작은 부침은 있었지만, 프로젝트는 잘 마무리되었다. 규모가 4배쯤 커진 다음 프로젝트에 또 리더 역할로 들어가서 일하고 있는데, 연말 워크숍이 계획되었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손을 들고 워크숍에서 지난 프로젝트의 진행 과정과 결과를 발표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다.


발표를 위해서 단상에 올라가자 부서원이 생각보다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서울로 복귀해서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만 해도 서른 명 남짓했던 부서가 몇 달 지나지도 않았는데 백 명을 넘기는 규모로 커져 있었다. 이렇게 빠르게 성장하는 부서라면 영향력이 점점 커질 테니 정말로 뭔가 바꿔나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산성 같은 재미없는 지표는 사람이 늘어날 수록 선형적으로 증가하기만 해도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지만, 올바른 가치에 대한 신념은 공감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초선형적으로 증가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준비한 내용을 하나씩 전달했다. 저희 프로젝트는 이런 프로젝트였습니다. 경험이 적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시작했고, 이런저런 이슈가 있었습니다. 지방 프로젝트에서 일할 때, 이슈를 추가근무로만 해결하려 하는 관리자가 얼마나 무능해 보이는지 알았기 때문에 저는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저희는 평균 주 41.8시간의 근무로 프로젝트를 마무리 할 수 있었고, 주어진 공수의 30%를 절감해서 고객에게 돌려주었습니다. 품질목표요? 당연히 달성했죠. 버그요? 버그가 뭐죠? 여유있게 개발하면 버그가 잘 안 생기더라구요.


그리고 제가 생각하기에 프로젝트를 잘 진행하고 구성원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리더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물론 다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다를 수 있고, 프로젝트 상황도 다 다르겠지만 그게 무엇이 되었든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과 결정에 확신을 가져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좋은 방향으로 나갈 힘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라고 이야기하고 발표를 마쳤다. 깜빡하고 연습하지 않았던 탓에 진심 어린 표정을 짓지는 못했지만 내 마음이 진심이었으니까 어쨌든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지금 들어와 있는 프로젝트는 확실히 지난 프로젝트에 비해서 악의적인 상황이 많고 일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확신을 가지고 프로젝트를 끌고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방향이 틀리지만 않는다면 3년쯤 뒤에는 뭔가 가시적인 변화가 보이지 않을까.


그리고 3년 뒤에 우리 부서는 사라졌고, 나는 들고 있던 확신을 떨어뜨렸다. 다시 또 몇 년이 지나서야 그 사실을 후회하고 깨진 조각들을 찾아다니고 있는데, 그러던 중 유튜브에 아무 생각 없이 올려놓은 옛 발표자료에서 큼지막한 조각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서른 살 때의 내가 했던 말들이 너무 낯설고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을 견디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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