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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지나치다

June 2012. 2. 22. 02:46
1. 지나치다

가을은 있는 듯 없는 듯 지나고 겨울이 막 시작되려고 할 때, 생각했던 모든 즐거운 일들을 집어 던지고는 대전행 기차에 탔다.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대전에 내려가라는 소리를 들은 것도, 마음의 준비를 하지도 못하고 내려간 것도. 많은 사람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것도. 상황이 안 좋다는 말은 너무 많이 들어서 설마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안 좋겠냐는 의심이 들 정도 였다.

혼자 사는 것도 처음이고 지방에서 사는 것도 처음인데 잘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일 하는거야 어떻게 어떻게 하면 될 것 같은데 먹고 자고 지내는 것들이 걱정이었다. 혼자서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이었다. 대전역에서 내려서 지하철을 탈 때까지도 걱정은 끝나지 않았다. 지하철에서 내려서 양손 양어깨에 짐을 한 가득 들고 계단을 올라가면서도 걱정이 더 심해졌다. 당연히 역에서 택시를 타고 갔어야 되는 것이었는데 바보 같이 지하철을 타고 와서 이 짐을 다 들고 20분을 걸어갈 생각을 했다니. 이런 간단한 것 부터 제대로 못 하는데 앞으로 어떻게 지낼 수 있을까 걱정이 가득했다.

숙소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정리하고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결국 대전에 와버렸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저녁밥은 어떻게 먹어야 될지 부터 감이 오지 않았다. 집에 있으면 밥솥에서 밥 퍼서 먹으면 되는 건데. 밥이 없으면 라면을 먹어도 되는 건데. 여기서는 라면을 끓이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물은 어디 있는지 불은 어디 있는지 밥은 어디 있는지 식당은 어디있는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당연히 알 수가 없었다. 대전에 온지 50분 밖에 안 지났는데 알 리가 없었다.

낯 선 곳에서 낯 선 사람들과 낯 선 일을 해야 되는데 그 일이 무척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대로라면 내일 부터는 교육을 받으면서 이거 다 아는 건데 라면서 자신만만해 하고 있어야 됐는데. 교육 끝나고 친구들을 만나거나 책을 사거나 무작정 걷거나 집에 가서 자거나 모든지 할 수 있을텐데. 다 지나치고 당장 뭐 할지 부터 고민하고 있었다.

2. 지다

인터넷이 되지 않는데 어떻게 개발을 할까? 컴퓨터는 느려서 툭 하면 뻗어버리는데 어떻게 일을 할까? 생판 모르는 업무인데 그 업무의 미묘한 변경사항을 어떻게 적용시킬까. 처음 보는 플랫폼으로 코딩을 할 수 있을까? 상황이 좋지 않다는 말은 들었지만 주어진 환경을 보니 한숨을 쉬는 것 조차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든 것을 돌려보면서 테스트하기는 커녕 컴파일 조차 하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한숨을 쉬는 것이 사치라는 생각을 하는 것 조차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 싫다고 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하나 하나 했다. 10년만에 C 언어를 봤는데, 저기 붙어야 되는 것이 &인지 *인지도 가물가물한데 인터넷이 안 되니까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스마트한 시대라서 핸드폰으로도 인터넷이 되니까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검색할 것은 산더미 같이 많았는데 핸드폰은 화면도 키보드도 너무 작았다. 고쳐야 되는 부분이 자바로 되어 있으면 그래도 좀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속도를 내서 고쳤다. 그런데 컴파일이 되지 않으니까 간단한 코드 어시스트 조차 먹지 않았다. 전산전공자 치고 종이에 손으로 코드 짜본 경험 없는 사람도 드물었지만 그건 20줄 남짓한 코드였지 여기처럼 1000줄 남짓한 코드를 어시스트 없이 짜는 경험은 아니었다.

전혀 생소한 용어들로 가득한 요구사항들. 요구사항을 코드로 옮기는 것이 개발자라지만, 요구사항을 읽는 것도 코드를 쓰는 것도 어려웠다. 지난 2년간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 내가 실력이 늘기는 했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자꾸 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기지 못 할 것 같았다. 이길 자신이 없었다.

3. 치다

프로젝트가 재미있게 흘러갔다. 사실 내가 개발하는 것들은 프로젝트가 정말 안 좋은 상황으로 흘러 갈 때를 대비한 것이지 실제로 반영될 것은 아니었다. 내가 짠 코드들은 원래 완성과 동시에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운명이었다. 원본이 잘 나가면 백업은 폐기처분 되는 법이니까. 이런 말도 안되는 환경에서 제대로 동작하는 코드가 나올 리가 없었는데, 그걸 다들 알고 있었는데 시켰던 것은 원래 안 쓰일 코드였으니까. 그런데 프로젝트는 정말 당연하다는 듯이 안 좋은 상황으로 흘러가고 내가 만든 백업 코드들은 시간을 벌기 위해 반영 되어야 된다는 결정이 내려왔다.

머리 속에서 비상이 걸렸다. 자바와 C를 합쳐서 수백 라인의 코드를 만들고 수백 라인의 코드를 고쳤는데, 아직 컴파일 한 번 하지 못했는데 실제 시스템에 반영된다니. 목표했던 동작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은 둘째치고 빌드는 제대로 될까 링크는 제대로 될까 아니 그 전에 컴파일은 제대로 될 까.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 둔, 유난히 추웠던 날 저녁에 반영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클립스를 쓴 이후로, 그러니까 대학교 2학년때 이후로 처음으로 자바에서 컴파일 에러를 만났다. 그것도 수백개를. C는 말할 것도 없었다.  아무도 나한테 시스템이 자바 1.4에서 굴러간다고 이야기 해주지 않았는데. 나는 자바 1.5부터 자바를 배워서 습관적으로 1.5 문법을 썼을 뿐인데 그 문법 하나하나가 다 컴파일 오류였다. 내일 아침까지 반영이 끝나야 된다고 그랬는데 이걸 언제 다 고칠까 싶었다. 문득 이 오류를 다 고친다고 해서 이게 제대로 굴러간다는 보장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컴파일 오류는 원래 한 방에 모든 오류가 다 나오는 것은 아니다. 한 무더기를 고쳐서 다시 돌리면 그 오류에 가려져던 오류들이 새롭게 나온다. 오류 하나 하나가, 너무나도 기초적이었던 그 오류 하나 하나가 내가 가지고 있던 자신감을 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침 해가 뜰 때 쯤에는 만싱창이가 되어 있었다. 자신감도 자부심도 그와 비슷한 종류의 모든 마음이 전부.

4. 지나치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상황이 어렵고 안 좋은 프로젝트 였지만 그래도 새해니까 다들 일을 쉬고 가족 혹은 연인을 보러 올라가거나 내려갔다. 그리고 나한테는 새해와 함께 데드라인이 다가왔다. 운영을 맡은 회사에서 친히 프로그램이 제대로 동작하나 점검해주었다. 그리고 당연스럽게도 안 되는 것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컴파일되고 빌드가 되었다고 끝났을리가 없었다.

고치는 작업이야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뭐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만들어서 나온 오류들이 많았으니까. 뭐가 이렇게 굴러가야 된다고 지적이 나오면 그걸 고치는게 어려울 리가 없었다. 그런데 쉽게 끝나지가 않았다. 하나가 끝나면 다른 하나가 나왔다. 좀 몰아서 주거나 이런 간단한 거는 직접 고치면 안되냐고 하고 싶었는데 의사소통은 철저히 일방통행 이었다. 별로 어렵지 않은 일들을 어렵게 받았다. 결국 그 날은 해를 넘겨서야 숙소에 돌아갈 수 있었다.

새해가 되었다. 그리고 전화가 울렸다. 그래서 출근을 했다. 이를 악물고 참아가면서 일을 했다. 다행히도 일찍 끝났다. 퇴근을 하면서 생각했다. 정말 다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무능했다고 생각하면 비참해지고 내가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면 억울해지는 이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 뭘 해야 될 지 고민하고 있으려니 조금 즐거운 기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제 여기 내려올 때 주어졌던 임무는 다 완수했으니까 앞으로 잘 해나갈 생각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몇 일 뒤, 발령연장 통보를 받았다. 프로젝트가 끝날 때 까지 올라가지 못한다고 그랬다. 이건 정말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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