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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4번 출구 앞 이니스프리

June 2019. 7. 16. 03:06

나는 그저 집에 가고 싶었다.

목적이 단순하다고 그 과정까지 단순할 것이라 믿는 것은 사회초년생들이나 할만한 생각이다. 사회구년생이었던 나는 집에 가는 일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별다른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래서 별다른 거부감 없이 경로를 탐색하기 시작했고, 곧 실패했다.

집에 가기 위해서는 지하철을 타야 했고, 이 시간대의 지하철 준비생들이 다들 그렇듯이 나도 막차 시간을 체크했다. 가는 길에 화장실에 들르거나 반대 방향 플랫폼으로 내려가거나 갑자기 멈춰 서서 AVL 트리의 회전 공식과 시간 복잡도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는 이상은 천천히 걸어가도 지하철 문이 열리기 전에 도착할만한 시간이었다. 시간의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공간의 문제가 조금 있었다. 가야 할 곳을 찾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당장 중등 난시인 내 눈앞에도 4번 출구가 선명하게 보였으니까. 아마도 30미터 정도. 하지만 그 짧은 거리를 포함하는 공간 속에는 너무 많은 사람이 있었다. 아마도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그사이에 지나갈 틈은 보이지 않았고, 경로는 차단되었다.

머릿속에서 열심히 경로를 재탐색하기 시작했다. 몇 가지 다른 경로가 떠올랐다. 앞으로 쭉 걸어가서 저 끝이 보이지 않는 줄의 끝을 찾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8차선 횡단보도를 건너서 돌아가는 경로까지.

130미터를 돌아가면 시간 내에 지하철을 탈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뒤를 돌아봤다. 이 시간대의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들과 소음들이 느껴졌다. 달빛보다 환한 인공조명들. 바람 소리보다 시끄러운 버스 소리들. 아직 문을 닫지 않은 상점들과 아직 집에 가지 못한 사람들. 차분히 걸어가는 사람들과 상당히 취해서 비틀거리는 사람.

아무래도 130미터를 돌아가면 시간 내에 지하철을 탈 수 없을 것 같아서 다시 앞을 보고 빽빽한 퍼스널 스페이스 사이에서 지나갈 만한 퍼블릭 스페이스를 찾아보려 노력했고, 곧 실패했다. 사실 버스를 기다리는 줄은 그 간격이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을 텐데 사소한 조급함과 걱정들이 저런 줄을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처한 기분이 들어서 뒤를 흘낏 봤는데 여전히 인공조명들, 버스들, 상점들, 집에 가지 못한 사람들과 상당히 취한 사람 외에는 아무런 희망을 찾지 못했다.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방금 전까지는 상당히 취해서 비틀거리는 사람이었는데. 나이가 꽤 지긋해 보이는 그 사람은 5초 전까지만 해도 보수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비틀거렸는데, 지금은 호수섬의 뿌리 깊은 나무처럼 안정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물론 그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진 이유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 사람은 용케도 쓰러지기 전에 의지할 곳을 찾았고, 그 덕분에 무서운 세월의 무거움과 치기로 쌓아 올린 취기에도 넘어지지 않고 의연하게 서 있을 수 있었다.

기댈 곳이 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부러운 일이지만 사실 별로 부럽지는 않았다. 당장이라도 놓치면 나 자신이 한없이 무너질 것처럼 나에게 소중한 무언가가 문 닫은 상점 앞의 낮은 난간 하나라면 나는 만족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별로 고민할 만한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에 간신히 의지하는 모습이라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냥 집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고, 스스로 길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짧은 마법의 주문으로 없던 공간을 만들어냈다. '잠시만요!' 그다음은 거칠 것이 없었다. 꽃의 이름을 부르는 심정으로 잠들어 있던 에스컬레이터를 깨워서 지하철역으로 내려갔다. 2호선 플랫폼까지는 꽤 멀었지만 더 이상 길을 막고 있는 사람들은 없었기에 빠르게 계단을 내려가고, 조금 더 걷고, 계단을 올라가고, 개찰구에 카드를 찍고, 계단을 내려가서 플랫폼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곧 마지막 열차가 들어온다는 표시를 볼 수 있었다. 최적화에 성공한 느낌이 들어서 매우 만족스러웠다.

곧 열차가 들어왔다. 마지막 열차였지만 앉을 만한 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뭐, 사람들이 많이 내릴 역은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면서 아무 난간에나 기대어서 다음 턴을 기다렸다.  나는 취하지도 않았고 지치지도, 쓰러질 것 같지도 않았기에 이 난간은 조금도 소중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살짝 인지 부조화가 와서 기대었던 몸을 바르게 세웠다. 그리고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오는 가벼운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지하철의 사소한 흔들림에도 기댈 곳이나 잡을 것 그러니까 4번 출구 앞 이니스프리에 있는 낮은 난간 같은 것이 없어도 굳게 서 있을 수 있었으니까. 역시 나는 무언가에 의존하고 의지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어서 기뻤다.

그리고 그게 자랑할 만한 사실이 아니라는 생각에 힘이 쭉 빠졌다. 만약 앞으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다가온다면 나는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내가 겪어보지 못한 어려움에 얼마나 자신감과 자기 자신을 놓치지 않을 수 있을까? 위로에 면역인 자립심 강한 캐릭터는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당장 내일 아침에 반드시 다가올 숨 막히는 기분을 속으로 꾹꾹 삼키며 일어날 수 있을까?

이내 작은 흔들림에도 비틀거리다 넘어질 것 같은 기분이 되어버려서 뭐라도 기댈 곳을 찾다가 아무 난간에나 기대어서 참담한 심정으로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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